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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애송시 / 안명지(소설가)

洪 海 里 2017. 5. 6. 10:50

나의 애송시 / 안명지(소설가)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홍해리 시인과 나는 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 시인은 귀가 하면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내 가게에 가끔 들르시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막걸리로 시인을 대접한다. 소박한 막걸리 한두 병을 비우며 시인과 문학이야기를 나누는 건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경제적인 얘기, 매스컴에서 날마다 쏟아지는 무서운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시와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로 익어가는 오후의 시간인 것이다

   홍해리 시인의 「가을 들녘에 서서」는 내 가게 벽에 시화로 만들어 액자에 넣어 걸려 있다. 처음 그 시를 감상했을 때, 마치 시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해 전율했다. 지나온 내 삶을 몇 마디 언어로 함축해 놓은 라니 ……, 나는 단박에 시에 빠져들었다. 액자에 담긴 시화가 가게 벽에 걸린 이유도 그 때문이다.

   순전히 내가 좋아서 벽에 걸어 놓은 것이었는데 뜻밖에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들이 이 시를 좋아했다. 손님과 시로서 마음을 공유하게 되는 덤을 얻은 것이다. 대개의 손님들은, 잠시 기다리는 동안 왼쪽 벽에 걸려 있는 한 편의 짧은 시를 읽는 것이었다. 시에 대해 문외한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한번쯤 시를 읽는 손님들을 보면서 참으로 뿌듯하고 그들과 금방 가까워진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가을 들녘에 서서」 라는 시의 제목부터가 중년인 그들에게 눈길을 끌기도 하지만 지난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생을 함축해 놓은 시어 때문일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시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그들에게 한마디 건넨다.

   “시가 우리들 살아 온 얘기 같지요?”

   거래가 아닌 시로 공감대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손님들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나는 「가을 들녘에 서서」라는 시 한 편을 통해 손님들과 인생살이의 애환을 가슴으로 주고받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고 행복한 일인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우리가 살아온 자화상을 언어라는 그림으로 그려놓은 시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모두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선 중년과 말년의 삶. 무엇인가를 가지려하고, 성취하려던 젊은 시절을 지나, 추수가 끝난 너른 들판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 시 앞에서 나 또한 회한과 여유와 평온이 섞인 모순의 감정과 맞닥뜨린다.

   마음이 가난했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갑작스런 결혼생활의 파탄은 나를 거대한 방황이란 바람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무엇이, 누가, 나를 이 방황에서 구해내 줄 것인가 수없이 자신에게 물었지만 그 어떤 대답도 구원의 손길도 없었다.

   그렇게 젊음을 보내고 허덕이다 보니 어느새 중년이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 즈음이기에 「가을 들녘에 서서」가 내 가슴을 더욱 흔들었는지 모른다. 특히 이 시에서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를 좋아한다. 거친 파도를 넘고 넘어서야 영혼이 맑아지는, 그래서 눈물겨운 마음자리에 스스로 빛이 나는 이 자연의 질서 앞에 경건해 지니 말이다.

   슬픔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고 했다. 누구나 젊은 시절엔 슬픔을 경험하거나 헛된 꿈을 좇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말처럼 그 시절을 극복하고 나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니" 어떠한 삶도 아름답지 않은 게 없지 않겠는가.

 

* 약력 *

 

2014년 《문학의식》 가을호 소설 등단

2016년 경북일보 문학대전 소설부문 가작 당선

 

주 소 : 서울 강북구 삼양로 599번지(우이동1). 우이수입고기총판

전화번호: 010-2734-9997

이름 : 안 명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