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매화와 낙타의 이중창 - 洪海里 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 임채우

洪 海 里 2017. 5. 31. 21:43

<해설>


매화와 낙타의 이중창

- 洪海里 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

 

임채우(시인)

 

 

   아내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사랑 고백인 시집치매행致梅行』(황금마루, 2015)이 발간되자 우리 시단은 경악했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 입장에서 150편 분량의 시집을 펴낸 것은 우리 시문학사상 초유의 일이었다.치매행致梅行은 이 땅의 치매환자 80여만 명을 돌보는 가족은 물론이고 수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그 시집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인께서 시집매화에 이르는 길을 상재했다. 이 시집은치매행致梅行의 속편으로 각 시편의 부제가「치매행·151~230」이다. 같은 내용의 시편 80편이 추가된 것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번 시집은 전편에 비교하면 더 성숙하고 진화된 모습을 보인다. 전편이 치매에 걸린 지어미를 돌보는 한 지아비의 사랑을 노래했다면, 속편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시인은 이로써 치매행을 완결 짓는다고 하니 앞으로 더는 이 제목의 시를 볼 수 없을 것 같다. 치매행은 단지 아내를 병구완하는 지아비의 고통, 절망, 몸부림을 보여주는 시집이 아니다. 전편과 속편을 통틀어 여기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매화에 이르는 길을 주목해야 한다.

 

   시인께서 이번 시집의 책머리에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 치매다.”라고 전편의 책머리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이어, “나도 언제 세상을 꽃으로 보고 그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길 끝에 매화가 피어 있다.”라고 짧게 끝내고 있다.

이 책머리에서 우리가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희구하여 마지않은 세계가 치매, 즉 매화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그 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 걷고 있다고 하지는 않았다.) ‘매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치매=치매致梅=매화에 이르는 길을 전제한다면 결국 매화란 무념무상의 세계이며,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세계에 대한 은유다. 매화에 이르는 길은 어떻게 가능할까? 위의 논리대로 한다면, 치매癡呆에 걸리면 갈 수 있다. 지금 아내는 그 길에 들어섰는데 다변하고 자의식이 충만한 화자는 도저히 그 세계에 갈 수 없다. 이것이 이 시집 전편에 걸쳐 있는 모든 갈등의 원인이며 비극이다.

 

  매화와 낙타와의 거리

 

아내의 나라는

말이 웃음으로 꽃피는 곳,

 

그냥 바라다보면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듯

웃음이 모든 말이 되는

천국이지만,

()

 

오늘도 남편이란 이름이 쓸쓸해

나이 든 낙타는 막막한 사막을 생각합니다.

-낙타행 - 치매행 · 152부분

 

   세상에서 치매에 걸렸다고 말하는 아내의 세계를 화자는 자유의 나라”, “천국으로 비유한다. 그곳은 말이 웃음으로 꽃피는 곳이며, 웃음이 모든 말이 되는 세계다. 불교의 염화미소拈華微笑가 연상되는 이 세계는 말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는 세계다.

반면에 화자가 처해 있는 세계는 작달비 내리퍼붓는 해질녘/ 너덜겅길”(치매행·151, 이하 숫자만 기록함)이며, 자신을 사막을 걷고 있는 나이 든 낙타로 비유한다. 니체가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서 말하면서 가장 저급한 단계로 낙타를 들었다. 오로지 의무에만 매달려 있는 자, 짐을 잔뜩 실은 노예 상태의 인간 정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돌봐야 하는 화자의 처지를 비유한 말이지만, 이 말에는 아내와 화자의 세계가 구별되어 있음을, 자신은 매화의 세계를 희구하나 낙타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은연중 밝히고 있다.

   이 시집을 이해하는 요체는 시의 대상인 아내와 시인에게 부림을 받는 화자와의 거리 문제다. 시의 대상인 아내의 세계는 매화의 세계이고, 화자가 못내 희구하는 세계이며, 지고지순의 경지로 상정된다. 이런 아내를 돌보는 화자가 오히려 자의식과 언어의 벽에 의해 감옥에 갇히는 역전 현상으로 나타나며, 아내의 세계를 두드리는 화자의 의지는 번번이 좌절된다.

이 거리는 물리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 또는 심미적이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아내의 세계에 접목하고자 하는 화자는 합일의 경지를 지향하며, 갈등이 나타나지 않고 화해가 이루어지며, 행복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아무리 부부가 일심동체라 하지만 두 세계는 차원이 다르기에 합일은 실패로 돌아간다. 다시 거리가 멀어지면 아내의 세계에서 동떨어진 화자는 안타까운 방황과 절망감을 맛본다.

   이 둘의 관계는 지구를 돌고 있는 달로 비유할 수 있다. 지구와 달은 서로 끄는 힘으로 달이 지구 둘레를 끊임없이 돈다. 치매에 걸린 아내가 지구이고 그 주변을 맴도는 화자가 달인 셈이다. 가까워진 듯 보이지만 이들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또다시 달과 지구는 별개의 존재로 멀어진다. 그러다가 다시 하나가 되려는 듯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 운동이 둘 사이에 무한 반복된다. 이 시집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변주되면서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은 지구를 도는 달처럼 반복되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매화와 낙타와의 합창


 

우리라는 화물을 적재한

 

좌청호 우백左靑號右白號

 

한 쌍의 배

 

한평생 긴긴 세월 동안

 

망망한 바다

 

막막히 항해하는

 

멍텅구리배!

- 부부 - 치매행 · 165전문

 

   이 시는 아내와 화자를, 매화와 낙타를, 지구와 달을, 좌청호와 우백호를 우리로 부르고 있다.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우리라고 불리기까지 서로 닮거나 닮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많이 축적되었을까? 지구와 달을 합하여 무엇이라 부르는가. 화자는 우리라고 부른다. 비록 추진력도 없이 한평생 긴긴 세월 동안 망망한 바다를 막막히 항해하는 멍텅구리배이지만, 그래서 애잔한 페이소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라는 말에는 공동운명체라는 일체감이 배어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랑은 가벼워지는 것이라 하면서 아내는 젖은 옷을 갈아입으며 웃고 있다(182). 아내의 치매약을 화자가 잘못 먹어 이제 나도 치매 환자가 되었으며 내가 약을 먹어도 아내가 나았으면 좋겠다(186). 추석 연휴에 세상과 단절되어 두 늙은 내외가 무위하며 집안에서 노는 분위기를 연출한다(196). 그리하여 화자는 풍진 세상,/ 너 하나/ 나 하나/ 너랑 나랑,/ 달랑/ 달랑,”(225)이라고 두 음절 두 마디 형식으로 울림소리를 활용하여 들뜨는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낙타는 매화의 세계를 희구한다. 그러나 애당초 매화의 세계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이 추상적 관념을 다시 자유의 나라니 천국이니 하는 더 모호한 관념으로 덧입혀 더욱 오리무중이다. 정작 매화는 자신의 나라가 어떤 곳이라고 말한 적이 없고, 그것을 지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매화의 세계는 화자의 의식에만 존재한다.

화자가 매화의 세계에 도달하는 데는 두 가지 걸림돌이 있다. 하나는 매화의 세계는 화자의 의식 소산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세계가 있는지는 매화의 세계에 이미 도달한 자만이 알 수 있으나, 치매에 걸린 자와 걸리지 않는 자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또 하나는, 매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문법을 버리고 매화의 문법에 맞추어야 하나, 화자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화자를 부리는 시인이 말과 의식을 버리고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결국, 이 두 난제는 애초에 매화에 이르는 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목표를 상정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시인은 헛된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 점이 인간 존재의 비극적 실상이다. 인간이 상정한 목표, 저 이상 세계나 영원한 미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고투가 실로 장엄하며 눈물겹지 아니한가.

 

  매화와 낙타의 실상


   지구는 거의 제자리에 있다. 다만 달이 지구에서 점점 멀어져 거리가 발생한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시인의 자의식의 언어는 확대된다. 실상에 관한 반복적 언어가 구사되고 언어 유희(pun)가 암초처럼 불쑥 솟아오른다.

   이번 시집에서도 아내를 돌보는 시인의 눈물겨운 분투가 화자의 입을 통해 간단없이 나열된다. 아내와 화자가 소통되지 않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의 현장이다. 아내는 딸이 누군지, 시집간지도 모른다(155). 가장 신성한 아침을 먹는 시간에 늙은 밥을 앞에 놓고 깨작거리며 숟가락과 젓가락이 따로 논다(159, 163). 아내가 집안에서 보물찾기하듯 의심스러운 휴지 뭉치를 감춰두기도 하고(164), 명절이 돌아와도, 부모님 제사가 돌아와도 제사상을 차릴 수 없고(173), 자기에게 소홀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지뢰를 매설하기도 하고(175, 176, 191), 급기야 아내의 가출 사건으로 온 집안과 동네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183, 190). 참으로 많은 시편이 화자의 눈물겨운 고투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이와 같은 시편들은 전편에서 눈에 익었던 모습이다. 전편에는 자신의 운명에 반항하는 화자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는데, 이번 시집은 체념과 순응이 엿보여 오히려 읽는 이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이것을 달리 순명順命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꼿꼿한 시 정신 하나로 평생을 지탱해온 시인의 변화가 긍정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배고프면

밥 먹자 하고,

 

아프면

병원 가자는,

 

말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걱정 없겠다

정말 좋겠다.

- - 치매행 · 169전문

 

이  미 소통의 기대는 저버렸고, 매화를 돌봄의 지위로 격하시킨 화자의 바람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이다. 이 시에서 말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걱정 없겠다에서 말은 사치스러운 시적 소통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장 일상적인 대화를 뜻하는데, 아내는 그것마저 비우고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말에 집착하고 있기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낙타의 노래

 

   화자가 아내를 돌보면서 절망과 좌절만을 곱씹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시인의 성찰은 깊어 간다. 나는 누구이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을 뛰어넘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등등 성찰의 언어가 시편 속에서 빛난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란 물고기/ 한 마리/ 튀어올랐다/ 잠깐 눈 감은/ 사이 비늘이 반짝/ 사라지는”(185) 찰나의 현시, 한때라고 본다. 이 찰나의 존재가 의식과 말을 가지고 무한 상상의 시공을 펼치는 인간은 때로는 황량한 빈들의 꽃으로 피어나기도 하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일생이란 물음표로 시작하여 느낌표로 끝난다(102). 인간은 이승에서 꽃이 피고 진다고 안타까워하며(184), 또는 달관한 사람인 양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178). 어떤 이는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말하기도 한다(170).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잘났든 못났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요절하든 장수하든, “세월을 버리면서/ 쌓아 올리는 나이탑 따라/ 저문저문 저무는 가을날”(200)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저무는 가을날 같은 인생이어서, 비어 있는 들녘을 지나 집으로 가는 길”(109, 187, 207)이라는 성찰이다.

 

가을걷이 다 끝나고 나면

나는 가을 거지가 됩니다

불 꺼진 빈집에는

침묵의 울음이 찬바람에 사그라들고

길었던 기다림을 털어 버린

영혼의 눈썹 한 올 한 올 위로 눈이 내립니다

마지막 한 톨까지 새들에게 다 주고 난

빈 들녘이 마침내 가득해집니다

봐야 보이고 들어야 들리는

한세상 사는 일이 한줌 바람이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깨어, 나는

날개 속에 부리를 묻고 밤을 지새는

철새들같이

이제 망각의 긴 겨울잠에 들어

윤슬처럼 반짝이며 오는 봄을 꿈꾸고 싶어

영영 깨지 않을 잠속으로 들어갑니다.

- 들녘 - 치매행 · 174전문

 

   인간 존재의 실상을 들녘으로 비유한 시인은 시의 마지막을 영영 깨지 않을 잠속으로 들어간다고 노래하고 있다. 잠이란 무엇인가. 잠이란 인간의 의식과 말이 죽는 시간이다. 들녘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란 의식과 말이 안식을 얻어 매화에 이르는 길로 안내한다.

   결국, 시인은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와 아내의 거리가 가장 먼 대척점이다. 시인은 이 시집 전편에 걸쳐 너무나 자주 죽음을 암시하거나 노래하고 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절해고도에서 화자는 차라리 얼음미라가 되어 천년 뒤에 녹아 이 땅에 스며들어 화석이 되어 가루가 되는 삶을 꿈꾼다(180).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말하며(170), 죽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는가 하면(81, 210), 죽으면 그만이라는 세상, 병든 아내와 함께 죽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고 있다(117, 166).

물  론 노인이 제 일신도 지탱하기 힘든데 병든 아내를 병간호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죽을 만큼 힘든 일이다. 시편 행간에 흘러넘치는 죽고 싶다는 하소연을 그냥 듣고 넘겨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그러나 여기서 잠, 즉 죽음이란 인생의 깊은 성찰로서 죽음으로 봐야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매화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치매에 걸려 세상의 말을 버리고 무념무상의 세계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으면 매화에 이르는 길에 장애가 되는 의식이나 말이 사라져, 일찍이 어떤 인간도 말해 준 적이 없는 매화의 세계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낙타의 노래

 

   그러나 시인은 생에 대한 비관론에 사로잡혀 이승의 삶을 접고 무위의 세계로 돌아가자고 노래하고 있지는 않다. 아무리 무위의 삶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해도 이승에서의 삶이 그래도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매화 언저리에서 방황하는 삶이지만, 이승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인으로서의 열망과 고통 받는 자들끼리 서로 기억을 공유하며 나누는 우정을 값지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선배격인 원로 시인 한 분과의 우정을 소중히 여긴다.동병상련(194), 어제와 오늘(201), 홍주와 꽃게(219), 무려 세 편에 걸쳐 원로 시인과의 교류를 통해서 아픔을 공유하는 자들끼리의 우정의 소중함을 노래하고 있다. 우정은 빈들 같은 삶에서 서로를 붙들어 주는 힘이다.

   아울러 평생 언어를 다루는 시인이기에 매화에 이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인의 길을 버릴 수 없다는, 니체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너무나 인간적인 운명애運命愛. 그는 형편없이 구겨져 버린 삶 속에서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말로/ 차끈한 사랑의 언어로/ 진실되고 정확한 어휘로 시를 엮어,/ 자유와 생명과 자연을 찬양하고/ 사람과 사랑을 그리고 노래하리라.”(204)라고 새해 아침 메시지를 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시집의 끝부분에서 오늘이 마지막 산책이 아니기를, 이 길이 뭍길이든 물길이든 하늘길이든 어딘가로 이어지는 시작이기를”(229) 바라는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하면, 끝판에서는 오늘 밤 잠이 들면 깨어나지 말기를, 내일 아침 해 떠도 눈을 뜨지 않기를바라면서도 오늘 밤에 잠들면 깊은 잠자고 내일 아침 해 뜨면 깨어나기를”(230) 역설적으로 소망한다. 실로 매화와 낙타의 이중주는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화사한 연꽃이며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끈질기게 생을 이어가는 희망의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