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짓는다는 것
-치매행致梅行 · 158
반달 하나 하늘가에 심어 놓고
눈을 감은 채 바라다봅니다
먼 영원을 돌아 달이 다 익어
굴러갈 때가 되면
옷 짓고 밥 짓고 집 지어
네 마음 두루두루 가득하거라
내 눈물 지어 네 연못에 가득 차면
물길을 내 흘러가게 하리라
사랑이란 눈물로 씻은
바람과 햇빛 같은 것 아니겠느냐
아내여, 네 웃음에 나도 따라 짓지만
어찌하여 그것이 이리도 차고 아픈가.
♧ 늙은 밥
-치매행致梅行 · 159
아내와 마주앉아 아침을 먹다 보니
밥이 아주 많이 늙었습니다
피부도 거칠고 주름지고 저승꽃도 보입니다
꽃이 피는 밥을 아침으로 먹습니다
저녁이 아니라 아침입니다
아침은 가장 신선한 시간인데
태어난 지 며칠이나 되는 늙은 밥입니다
늙은 밥이 늙어서 불쌍하다고
숟가락 젓가락이 가락가락加樂加樂 놉니다
숟가락이 일할 때 젓가락이 놀고
젓가락이 일할 때 숟가락이 노래합니다
아침 먹은 힘으로 설거지를 합니다
밥 그릇 국 대접 반찬 접시
숟가락 젓가락 찻잔까지
씻고 부시고 깨뜨리면서 끝장이 납니다
아내는 노랜지 울음인지도 모르고
그냥 웃음꽃을 피우지만
꽃잎은 내 가슴에 떨어져 나를 울립니다.
♧ 비우고 버리다
-치매행致梅行 · 160
훨씬 더 오래 산 나보다 먼저
아내는
한 사람의 일생을 다 내려놓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는데
나는 아내가 내려놓은 것까지
몽땅 짊어지고 낑낑거리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바라보기만 해도 울렁거리던 가슴
물 건너간 지 오래
이제는 절벽처럼 먹먹하고 막막해
오늘은 마음속에 어떤 밥그릇을 안고
살아야 하나
스산한 봄날이 가고 세상은 푸르른데
민들레 꽃씨 하나 어딘가로 떠가고 있다.
♧ 한밤중
-치매행致梅行 · 161
시「다 저녁때」(치매행致梅行 · 1)를 쓸 때만 해도
아내는 참 순하고 착한 어른아이였습니다
지금은 나보다 더 거세찬 어른애가 되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막무가내
나를 밀치고 밖으로 나가려 듭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사실은 잘못 천지지만)
잘못했다고
내가 다 잘못했다고 빌며 구슬려 삶아도
한참을 버티다 지쳐서야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갑니다
도대체 대책, 대책이 없습니다
흑흑거리다 보면
세상이 온통 새까맣습니다
검정은 검정이고 하양은 하양인데
왜 검정이 하양으로 보이고
하양이 검정으로 여겨지는 세상인지
이렇듯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일어난 것은 쓰러지기 마련이고
온전한 그릇도 깨어지기 십상이긴 하지만
대낮도 한밤중인 날
나를 버리고 비우자고 다짐다짐해 봅니다.
♧ 막막미로
-치매행致梅行 · 162
어쩌자고 아내는
막막한 미로를 자유로이 헤매는지
뒤따르는 나는
벽에 부딪쳐 하루의 일수도 못 받고
긁히고 까지기가 일쑤입니다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길은
춥고 멀어 끝이 없지만
참고 가는 수밖에 길이 없습니다
손톱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내의 나라는
아무 이상 없는데
내 세상은 그냥 굴러가는 일이 없고
가슴속 바윗덩어리 너무 커서
백야의 꿈자리는 늘 사납습니다
자는 둥 마는 둥 자다 깨다 날이 새면
얼굴에도 마음에도 그늘이 무겁습니다
아무리 받걷이를 잘 해도
때로는 휙! 하니 돌아서는 아내
불길이고 물길입니다
저녁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새
가무룩가무룩합니다.
♧ 밥상머리
-치매행致梅行 · 163
도담도담 자라던 아기
반찬 투정 부릴 때처럼
맛있는 것 맛있다 말도 못하고
맛없는 것 맛없다 말도 못하는
께적께적 억지로 떠 넣는 숟가락질
밥알을 세다 사달이 나는
밥밑으로 검은콩에 작두콩까지 넣어도
아내의 입맛 하나 맞추지 못하는
나는 맛을 낼 줄도 피울 줄도 모르고
맛부리는 일에 멀기만 한 사내
도나캐나 먹으며 살던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던 때
밥상머리 앉으면
그립구나 그 시절.
♧ 소일거리
-치매행致梅行 · 164
나 심심할까 봐
아내는 부러 일을 만든다
이런저런 잔일로 내 잔일殘日이 바쁘다
보물찾기하듯
빈틈이 움켜쥐고 있는 휴지뭉텅이도 찾아내고
여기저기 그려 논 벽화도 지우며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 듯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오늘도 날이 저물고
몸은 콩가루처럼 피곤하다
삶이란 네가 나를 삶고
내가 너를 지지고 볶는 것 아닌가,
아닌가
맛이 간 내 생生의 어느 날
꿈속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별이 반짝일지 모르지만
도남圖南의 날개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부부
-치매행致梅行 · 165
‘우리’라는 화물을 적재한
좌청호 우백호左靑號右白號
한 쌍의 배
한평생 긴긴 세월 동안
망망한 바다
막막히 항해하는
멍텅구리배!
*洪海里 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도서출판 움, 201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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