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스크랩] 洪海里 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과 뜰보리수

洪 海 里 2017. 7. 5. 04:00



짓는다는 것

    -치매행致梅行 · 158

 

반달 하나 하늘가에 심어 놓고

눈을 감은 채 바라다봅니다

 

먼 영원을 돌아 달이 다 익어

굴러갈 때가 되면

 

옷 짓고 밥 짓고 집 지어

네 마음 두루두루 가득하거라

 

내 눈물 지어 네 연못에 가득 차면

물길을 내 흘러가게 하리라

 

사랑이란 눈물로 씻은

바람과 햇빛 같은 것 아니겠느냐

 

아내여, 네 웃음에 나도 따라 짓지만

어찌하여 그것이 이리도 차고 아픈가.

     

 

 

늙은 밥

    -치매행致梅行 · 159

 

아내와 마주앉아 아침을 먹다 보니

밥이 아주 많이 늙었습니다

피부도 거칠고 주름지고 저승꽃도 보입니다

꽃이 피는 밥을 아침으로 먹습니다

저녁이 아니라 아침입니다

아침은 가장 신선한 시간인데

태어난 지 며칠이나 되는 늙은 밥입니다

늙은 밥이 늙어서 불쌍하다고

숟가락 젓가락이 가락가락加樂加樂 놉니다

숟가락이 일할 때 젓가락이 놀고

젓가락이 일할 때 숟가락이 노래합니다

아침 먹은 힘으로 설거지를 합니다

밥 그릇 국 대접 반찬 접시

숟가락 젓가락 찻잔까지

씻고 부시고 깨뜨리면서 끝장이 납니다

아내는 노랜지 울음인지도 모르고

그냥 웃음꽃을 피우지만

꽃잎은 내 가슴에 떨어져 나를 울립니다. 


 

 

비우고 버리다

    -치매행致梅行 · 160

 

훨씬 더 오래 산 나보다 먼저

아내는

한 사람의 일생을 다 내려놓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는데

 

나는 아내가 내려놓은 것까지

몽땅 짊어지고 낑낑거리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바라보기만 해도 울렁거리던 가슴

물 건너간 지 오래

이제는 절벽처럼 먹먹하고 막막해

 

오늘은 마음속에 어떤 밥그릇을 안고

살아야 하나

스산한 봄날이 가고 세상은 푸르른데

민들레 꽃씨 하나 어딘가로 떠가고 있다. 


 

 

한밤중

    -치매행致梅行 · 161

 

다 저녁때(치매행致梅行 · 1)를 쓸 때만 해도

아내는 참 순하고 착한 어른아이였습니다

지금은 나보다 더 거세찬 어른애가 되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막무가내

나를 밀치고 밖으로 나가려 듭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사실은 잘못 천지지만)

잘못했다고

내가 다 잘못했다고 빌며 구슬려 삶아도

한참을 버티다 지쳐서야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갑니다

도대체 대책, 대책이 없습니다

흑흑거리다 보면

세상이 온통 새까맣습니다

검정은 검정이고 하양은 하양인데

왜 검정이 하양으로 보이고

하양이 검정으로 여겨지는 세상인지

이렇듯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일어난 것은 쓰러지기 마련이고

온전한 그릇도 깨어지기 십상이긴 하지만

대낮도 한밤중인 날

나를 버리고 비우자고 다짐다짐해 봅니다.

   

 

 

막막미로

    -치매행致梅行 · 162

 

어쩌자고 아내는

막막한 미로를 자유로이 헤매는지

뒤따르는 나는

벽에 부딪쳐 하루의 일수도 못 받고

긁히고 까지기가 일쑤입니다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길은

춥고 멀어 끝이 없지만

참고 가는 수밖에 길이 없습니다

손톱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내의 나라는

아무 이상 없는데

내 세상은 그냥 굴러가는 일이 없고

가슴속 바윗덩어리 너무 커서

백야의 꿈자리는 늘 사납습니다

자는 둥 마는 둥 자다 깨다 날이 새면

얼굴에도 마음에도 그늘이 무겁습니다

아무리 받걷이를 잘 해도

때로는 휙! 하니 돌아서는 아내

불길이고 물길입니다

저녁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새

가무룩가무룩합니다.

   

 

 

밥상머리

    -치매행致梅行 · 163

 

도담도담 자라던 아기

반찬 투정 부릴 때처럼

 

맛있는 것 맛있다 말도 못하고

맛없는 것 맛없다 말도 못하는

 

께적께적 억지로 떠 넣는 숟가락질

밥알을 세다 사달이 나는

 

밥밑으로 검은콩에 작두콩까지 넣어도

아내의 입맛 하나 맞추지 못하는

 

나는 맛을 낼 줄도 피울 줄도 모르고

맛부리는 일에 멀기만 한 사내

 

도나캐나 먹으며 살던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던 때

 

밥상머리 앉으면

그립구나 그 시절.

   

 

 

소일거리

    -치매행致梅行 · 164

 

나 심심할까 봐

아내는 부러 일을 만든다

이런저런 잔일로 내 잔일殘日이 바쁘다

 

보물찾기하듯

빈틈이 움켜쥐고 있는 휴지뭉텅이도 찾아내고

여기저기 그려 논 벽화도 지우며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 듯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오늘도 날이 저물고

몸은 콩가루처럼 피곤하다

삶이란 네가 나를 삶고

내가 너를 지지고 볶는 것 아닌가,

아닌가

 

맛이 간 내 생의 어느 날

꿈속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별이 반짝일지 모르지만

도남圖南의 날개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부

    -치매행致梅行 · 165

 

우리라는 화물을 적재한

 

좌청호 우백호左靑號右白號

 

한 쌍의 배

 

한평생 긴긴 세월 동안

 

망망한 바다

 

막막히 항해하는

 

멍텅구리배!


                         *洪海里 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도서출판 움, 2017)에서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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