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풍류
날선 비수같은 달빛이
눈꽃 핀 댓잎 위에 내려앉았다
달빛에 놀라 쏟아져 내린 은싸라기
그날 밤 대나무는 숨을 놓았다
목숨 떠난 이파리는 바람에 떨고
대나무는 바람神을 맞아 들여
텅 빈 가슴 속에 소리집을 짓는다
그렇게 몇 번의 겨울이 가고 나면
대나무는 마디마디 시린 한恨을 품어
줄줄이 소리 가락을 푸르게 풀어낸다
때로는 피리니 대금이니 이름하니
제 소리를 어쩌지 못해 대나무는
막힌 구멍을 풀어줄 때마다
실실이 푸른 한을 한 가닥씩 뿜어낸다
사람들은 마침내 바람 흘러가는 소리를
귀에 담아 풍류風流라 일컫는다
♧ 계영배戒盈杯
속정 깊은 사람 가슴속
따르고 따루어도 가득 차지 않는
잔 하나 감춰 두고
한마悍馬 한 마리 잡아타고
먼 길 같이 떠나고 싶네
마음 딴 데 두지 마라, 산들라
세상에 가장 따순 네 입술 같이나
한잔 술이 내 영혼을 데우는 것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그리움처럼
줄지도 넘치지도 않는 술잔 위로
별들이 내려 빙글빙글 도는 것은,
무위無爲도 자연自然도 아니어서
내 마음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인가
은자隱者의 눈빛이나 미소처럼
입 안 가득 번지는 넉넉한 향을
눈물로 태울까 말씀으로 비울까
온몸으로 따루어도
채워지지 않고 비워지지 않는
잔,
깊고 따뜻한 너.
♧ 인화仁華에게
인화仁華, 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푸른 풀밭이 아래위로 펼쳐져 있고
일곱 개 십자 막대의 울타리 목장
함치르르한 풀밭으로
함함한 양을 몰고 가는 그의 흰 손과
무작정 가고 있는 양이 보인다
양은 눈빛이 착하고 순한 천사다
풀밭이 다하면
절벽,
바람이 절벽을 타듯
양은 절벽을 오른다
첫 입맞춤을 하고
처음으로 속삭이는 말처럼
하늘 아래 자명自鳴하는 것은
환하다, 자명自明하다
해 지는 곳이
함지陷池이든 함지咸地이든 무슨 상관이랴
끝없이 펼쳐진 풀밭을
양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풀밭에 양 발자국이 없는 것은
두 사람의 눈빛으로 하늘에 찍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따뜻하다.
♧ 구두끈
저녁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두끈이 풀어져
거치적거리는 것도 모르고
허위허위 걸어왔다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묶어야 할 것은 묶고
매야 할 것은 단단히 매야 하는데
풀어진 구두끈처럼
몸이 풀어져 허우적거린다
풀어진다는 것은
매이고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이고
질기고 단단한 것이 흐늘흐늘해지는 것이고
모두가 해소되고, 잘 섞이어지는 것이다
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구두끈도 때로는 풀어져
한평생 싣고 온 짐을 부리듯
사막길 벗어나는 꿈을 꾸는 것을
나는 이제껏 모른 채 살아왔다
끈은 오로지 묶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구속당하는 것이 유일한 제 임무였다
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몸으로 제가 저를 잡고 있어야 하지만
끈은 늘 풀어지려고 모반을 꾀하고
헐렁해지고 싶어 일탈을 꿈꾼다
때로는 끈을 풀어 푸른 자유를 줘야 하는데
지금까지 나는 구속만 강요해 왔다
이제 몸도 풀어 줘야 할 때가 된 것인가
오늘도 구두끈이 풀어진 것도 모르고
고삐 없는 노마駑馬가 되어
휘적휘적 걸어서 어딘가로 가고 있다.
♧ 분수噴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지만
물은 스스로 분수를 알아
적당한 높이에서
몸을 낮추고
한 송이 꽃을 피우면서 지고 마는
절정의 순간
햇살이 잠시 쉬었다 가고
바람도 옷자락을 흔들어 주고
흰구름이 가만히 손을 얹는다
금빛 꿈이란 늘 허망한 법
촉촉이 젖어 있는 너의 언저리
낭랑낭랑 흐르는 눈물의 반짝
허공에 부서진다.
* 홍해리 시집 '비밀'(우리글 대표시선 17. 2010.)에서
* 사진 : 방림원에서 찍은 독일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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