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스크랩] 홍해리 시집 `비밀`의 시

洪 海 里 2017. 8. 9. 19:19



대풍류

 

날선 비수같은 달빛이

눈꽃 핀 댓잎 위에 내려앉았다

달빛에 놀라 쏟아져 내린 은싸라기

그날 밤 대나무는 숨을 놓았다

목숨 떠난 이파리는 바람에 떨고

대나무는 바람을 맞아 들여

텅 빈 가슴 속에 소리집을 짓는다

그렇게 몇 번의 겨울이 가고 나면

대나무는 마디마디 시린 한을 품어

줄줄이 소리 가락을 푸르게 풀어낸다

때로는 피리니 대금이니 이름하니

제 소리를 어쩌지 못해 대나무는

막힌 구멍을 풀어줄 때마다

실실이 푸른 한을 한 가닥씩 뿜어낸다

사람들은 마침내 바람 흘러가는 소리를

귀에 담아 풍류風流라 일컫는다

    

 

 

계영배戒盈杯

 

속정 깊은 사람 가슴속

따르고 따루어도 가득 차지 않는

잔 하나 감춰 두고

한마悍馬 한 마리 잡아타고

먼 길 같이 떠나고 싶네

마음 딴 데 두지 마라, 산들라

세상에 가장 따순 네 입술 같이나

한잔 술이 내 영혼을 데우는 것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그리움처럼

줄지도 넘치지도 않는 술잔 위로

별들이 내려 빙글빙글 도는 것은,

무위無爲도 자연自然도 아니어서

내 마음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인가

은자隱者의 눈빛이나 미소처럼

입 안 가득 번지는 넉넉한 향을

눈물로 태울까 말씀으로 비울까

온몸으로 따루어도

채워지지 않고 비워지지 않는

,

깊고 따뜻한 너.

     

  

 

인화仁華에게

 

인화仁華, 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푸른 풀밭이 아래위로 펼쳐져 있고

일곱 개 십자 막대의 울타리 목장

함치르르한 풀밭으로

함함한 양을 몰고 가는 그의 흰 손과

무작정 가고 있는 양이 보인다

양은 눈빛이 착하고 순한 천사다

풀밭이 다하면

절벽,

바람이 절벽을 타듯

양은 절벽을 오른다

첫 입맞춤을 하고

처음으로 속삭이는 말처럼

하늘 아래 자명自鳴하는 것은

환하다, 자명自明하다

해 지는 곳이

함지陷池이든 함지咸地이든 무슨 상관이랴

끝없이 펼쳐진 풀밭을

양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풀밭에 양 발자국이 없는 것은

두 사람의 눈빛으로 하늘에 찍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따뜻하다.

    

 

 

구두끈

 

저녁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두끈이 풀어져

거치적거리는 것도 모르고

허위허위 걸어왔다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묶어야 할 것은 묶고

매야 할 것은 단단히 매야 하는데

풀어진 구두끈처럼

몸이 풀어져 허우적거린다

풀어진다는 것은

매이고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이고

질기고 단단한 것이 흐늘흐늘해지는 것이고

모두가 해소되고, 잘 섞이어지는 것이다

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구두끈도 때로는 풀어져

한평생 싣고 온 짐을 부리듯

사막길 벗어나는 꿈을 꾸는 것을

나는 이제껏 모른 채 살아왔다

끈은 오로지 묶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구속당하는 것이 유일한 제 임무였다

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몸으로 제가 저를 잡고 있어야 하지만

끈은 늘 풀어지려고 모반을 꾀하고

헐렁해지고 싶어 일탈을 꿈꾼다

때로는 끈을 풀어 푸른 자유를 줘야 하는데

지금까지 나는 구속만 강요해 왔다

이제 몸도 풀어 줘야 할 때가 된 것인가

오늘도 구두끈이 풀어진 것도 모르고

고삐 없는 노마駑馬가 되어

휘적휘적 걸어서 어딘가로 가고 있다.

    

 

 

분수噴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지만

물은 스스로 분수를 알아

적당한 높이에서

몸을 낮추고

한 송이 꽃을 피우면서 지고 마는

절정의 순간

햇살이 잠시 쉬었다 가고

바람도 옷자락을 흔들어 주고

흰구름이 가만히 손을 얹는다

금빛 꿈이란 늘 허망한 법

촉촉이 젖어 있는 너의 언저리

낭랑낭랑 흐르는 눈물의 반짝

허공에 부서진다.


* 홍해리 시집 '비밀'(우리글 대표시선 17. 2010.)에서

      * 사진 : 방림원에서 찍은 독일잔대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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