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낮술 이야기 / 이동훈(시인), 월간《우리詩》2017. 12월호

洪 海 里 2018. 2. 26. 17:34

  <장엄한 낮술 이야기>


낮술로 논배미 융단 탄 홍해리


           이 동 훈(시인)



  상황이야 어찌됐든 낮술이 생활을 저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만

아예 낮술이 생활과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겠다. 낮술에 치우쳐 일

상이 말려들어간 경우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낮술이 일상의 밥과 같이 노

동의 밑천이 되는 경우다. 앞서 막걸리를 밥과 동격으로 보았던 홍해리

시인의 시를 만나자.


할아버지 그을린 주름살 사이사이
시원스레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쑤욱쑥 솟아올라 몸 비비는 벼 포기들
떼개구리 놀고 있는 무논에 서서
잇사이로 털어내는 질박한 웃음소리
한여름 가마불에 타는 저 들녘
논두렁에 주저앉아 들이켜는 막걸리
녹색 융단 타고 나는 서녘 하늘끝.

   - 홍해리,「녹색 융단 타고 한잔」전문.


  "그을린 주름살"에서 농사일의 고단함이 물씬 묻어나 있지만, 가뭄

끝에 소나기 지나가니 무논의 생명들이 살판난다. 벼도 개구리도 사람

도 여간 신이 나는 게 아니다. 소나기는 금세 지나고 다시 "한여름 가마

불" 더위를 견뎌야 한다. 가마불은 숯이나 도자기를 굽는 가마의 온도

가 1000도를 예사로 넘는 데서 그 뜨거움을 과장하는 단어로 쓰이긴

했으나 무더위 속에서 일한다는 게 만만할 리 없다. 비 오듯 땀방울이

떨어지고 소나기 맞은 듯 작업복이 후줄근해진 날, 이때 한 사발 들이켜는

막걸리는 보약이 아닐 수 없다. 배부른 자에게 다이어트는 하나의 취

미로 여겨도 무방하겠지만 배고픈 자에게 공복은 초열지옥이나 뭐가 다

를까. 샛요기로꺼내든 막걸리 한 사발이 지옥 구경에 눈을 닫고 천당

쪽으로 돌아서게 한다.

  마른논이 물을 끌어당겨 벼를 살리듯 막걸리도 사람의 기를 살려준

다. 낮술 한 잔으로 그네 타는 사람들을 종종 봐 왔지만 "녹색 융단 타고

나는 서녘 하늘"은 훨씬 더 기분을 낸 거다. 알근하니 좋게 마신 술이

푸른 벼의 논배미를 융단으로 느끼게 한다. 그 위에 한결 가벼워진

자신을 태우고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마술이란 아름답기까지 하다.

  논두렁에서 막걸리와 김치가 제격이라지만, 목에 얹힌 쇳가루는

소주와 삼겹살로 내리는 것이 좋다. 이처럼 술은 땀 흘려 일하는 사람에겐

밥이고 약이다. 또한 머리에 쓸데없는 공상이 이어지고 양식이 되지 않

는 글줄이나 끼적거린대도 그 도한 일인 줄 안다. 그렇다고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낮술을 뺏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특히,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일자리를 거듭 잃은 사람은 마시지도 않고

이미 독에 취한 사람이니 반대로 술로 독을 풀어주어야 한다. 모든 게 술

술 풀리면 술은 세상에 사라져도 그만이지만 세상일은 막히고 깨지는

게 예사다. 그래서 골목 어디서든 낮술의 위로가 필요하다.

               - 월간《우리詩》(2017. 12월호)

              - 『천천히, 깊이, 시를 읽고 싶은 당신에게』(2019,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