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벚나무 꽃잎 다 날리고
―은적암隱寂庵에서
꽃 지며 피는 이파리도 연하고 고와라
때가 되면 자는 바람에도 봄비처럼 내리는
엷은 듯 붉은빛 꽃 이파리 이파리여
잠깐 머물던 자리 버리고 하릴없이,
혹은 홀연히 오리나무 사이사이로
하르르하르르 내리는 산골짜기 암자터
기왕 가야할 길 망설일 것 있으랴만
우리들의 그리움도 사랑도 저리 지고 마는가
온 길이 어디고 갈 길이 어디든 어떠랴
하늘 가득 점점이 날리는 마음결마다
귀먹은 꽃 이파리 말도 못하고 아득히,
하늘하늘 깃털처럼 하염없이 지고 있는데
우리들 사는 게 구름결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가는 길이 물길 따르는 것일지라
흐르다 보면 우리도 문득 물빛으로 바래서
누군가를 위해 잠시 그들의 노래가 될 수 있으랴
재자재자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소리 따라
마음속 구름집도 그냥 삭아내리지마는
새로 피어나는 초록빛 이파리 더욱 고와라.
♧ 처녀치마
철쭉꽃 날개 달고 날아오르는 날
은빛 햇살은 오리나무 사이사이
나른, 하게 절로 풀어져 내리고,
은자나 된 듯 치마를 펼쳐 놓고
과거처럼 앉아 있는 처녀치마
네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면
몸 안에 천의 강이 흐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꽃대 하나 세워 놓고
구름집의 별들과 교신하고 있는
너의 침묵과 천근 고요를 본다.
♧ 금강초롱
1
초롱꽃은 해마다 곱게 피어서
금강경을 푸르게 설법하는데
쇠북은 언제 울어 네게 닿을까
내 귀는 언제 열려 너를 품을까
2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초롱꽃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 가을 산에서
-우이시편午耳詩篇 · 8
혼백을 하늘로 땅으로 돌려보낸
텅 빈 자궁 같은, 또는
생과 사의 경계 같은
가을 산에 서 있었네
지난봄 까막딱따구리가 파 놓은
오동나무 속 깊이
절 한 채 모셔 놓고
가지에 풍경 하나 달아 놓았네
감국 구절초 쑥부쟁이에게
안부를 남기고
물이 만들고 간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무장무장
먼 산에 이는 독약 같은 바람꽃
맑은 영혼의 나무들이 등불을 달고
여름내 쌓인 시름을 지우고 있었네
서리 내릴 때 서리 내리고
스러지는 파도가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지나간 세월이 내일의 꿈이 될 수 있을까
먼 길이 다가서는 산에 혼자 서 있었네.
♧ 메밀꽃
소복을 한 젊은 여자가
달빛과 달빛 사일 오가며
천상에서 바래인 옥양목 한 필을
산간에 펼쳐 널고 있다
겨드랑이 아래로 사태 지는 그리움
저 서늘한 불빛으로 달래며
천년을 사루어도 다 못할 정을
하얀 꽃으로 피우고 있다
달이 이울면 산이 쓸리고
반쯤 젖어 흔들리는 고운 목소리
알몸의 어둠을 하얗게 밝히고 있다.
♧ 은자隱者의 꿈
산 채로 서서 적멸에 든
고산대의 주목朱木 한 그루
타협을 거부하는 시인이
거문고 줄 팽팽히 조여 놓고
하늘 관棺을 이고
설한풍 속 추상으로 서 계시다
현과 현 사이
바람처럼 들락이는
마른 울음
때로는
배경이 되고
깊은 풍경이 되기도 하면서
듣는 이
보는 이 하나 없는
한밤에도 환하다
반듯하고 꼿꼿하시다.
♧ 한라산을 마시다
제주 표선 바닷가에 홀로 앉아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한라寒裸의 山 ‘한라산漢拏山’을 마신다
백옥의 관을 쓰고
빙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한라산
조근조근 말을 걸어오는 바다
한 해가 저무는 섣달 보름
다 저녁 때
산록에서는 사슴들 소리 뛰어놀고
한란寒蘭의 청향淸香이 가슴으로 흐르는데
차밭에서는 날아오는 눈 맑은 바람 따라
때로는,
우리도 1,950m 높이쯤은 취해야 한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명명明明하다면
차라리 바닷속으로 뛰어들 일이다
한라산이 뛰어드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불륜不倫/佛輪인가
몸속에서 ‘한라산바다’가 출렁인다
이제 제주엘 간다 해도
한라산은 올라갈 수 없다
내 몸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 파문波紋
1
나무는 서서 몸속에 호수를 기른다
햇빛과 비바람이 둥근 파문을 만들고
천둥과 번개가 아름답게 다듬어
밖으로 밖으로
번져나간다
파문이 멎으면 한 해가 간 것이다
2
잎 나고 꽃 피어 열매를 맺는 동안
속에서는 물이랑을 짓다
열매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나무는 일 년을 마무리하고
제 옷을 벗어 시린 발등을 덮고 나면
가지마다 악기가 되어
겨울을 노래 부를 때
하늘도 투명한 파문이 이는 호수가 된다.
『산림문학』2018년 봄호(통권29호, 사단법인 한국산림문학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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