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스크랩] `산림문학` 2018 봄호 초대시 `홍해리`

洪 海 里 2018. 3. 25. 04:25


산벚나무 꽃잎 다 날리고

    ―은적암隱寂庵에서

 

꽃 지며 피는 이파리도 연하고 고와라

때가 되면 자는 바람에도 봄비처럼 내리는

엷은 듯 붉은빛 꽃 이파리 이파리여

잠깐 머물던 자리 버리고 하릴없이,

혹은 홀연히 오리나무 사이사이로

하르르하르르 내리는 산골짜기 암자터

기왕 가야할 길 망설일 것 있으랴만

우리들의 그리움도 사랑도 저리 지고 마는가

온 길이 어디고 갈 길이 어디든 어떠랴

하늘 가득 점점이 날리는 마음결마다

귀먹은 꽃 이파리 말도 못하고 아득히,

하늘하늘 깃털처럼 하염없이 지고 있는데

우리들 사는 게 구름결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가는 길이 물길 따르는 것일지라

흐르다 보면 우리도 문득 물빛으로 바래서

누군가를 위해 잠시 그들의 노래가 될 수 있으랴

재자재자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소리 따라

마음속 구름집도 그냥 삭아내리지마는

새로 피어나는 초록빛 이파리 더욱 고와라.

        

 

처녀치마

 

철쭉꽃 날개 달고 날아오르는 날

은빛 햇살은 오리나무 사이사이

나른, 하게 절로 풀어져 내리고,

은자나 된 듯 치마를 펼쳐 놓고

과거처럼 앉아 있는 처녀치마

네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면

몸 안에 천의 강이 흐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꽃대 하나 세워 놓고

구름집의 별들과 교신하고 있는

너의 침묵과 천근 고요를 본다.



  

금강초롱

 

1

 

초롱꽃은 해마다 곱게 피어서

 

금강경을 푸르게 설법하는데

 

쇠북은 언제 울어 네게 닿을까

 

내 귀는 언제 열려 너를 품을까

 

2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초롱꽃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가을 산에서

   -우이시편午耳詩篇 · 8

 

혼백을 하늘로 땅으로 돌려보낸

텅 빈 자궁 같은, 또는

생과 사의 경계 같은

가을 산에 서 있었네

지난봄 까막딱따구리가 파 놓은

오동나무 속 깊이

절 한 채 모셔 놓고

가지에 풍경 하나 달아 놓았네

감국 구절초 쑥부쟁이에게

안부를 남기고

물이 만들고 간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무장무장

먼 산에 이는 독약 같은 바람꽃

맑은 영혼의 나무들이 등불을 달고

여름내 쌓인 시름을 지우고 있었네

서리 내릴 때 서리 내리고

스러지는 파도가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지나간 세월이 내일의 꿈이 될 수 있을까

먼 길이 다가서는 산에 혼자 서 있었네.



 

 

메밀꽃


소복을 한 젊은 여자가

달빛과 달빛 사일 오가며

천상에서 바래인 옥양목 한 필을

산간에 펼쳐 널고 있다

겨드랑이 아래로 사태 지는 그리움

저 서늘한 불빛으로 달래며

천년을 사루어도 다 못할 정을

하얀 꽃으로 피우고 있다

달이 이울면 산이 쓸리고

반쯤 젖어 흔들리는 고운 목소리

알몸의 어둠을 하얗게 밝히고 있다.


 

 

은자隱者의 꿈

 

산 채로 서서 적멸에 든

고산대의 주목朱木 한 그루

 

타협을 거부하는 시인이

거문고 줄 팽팽히 조여 놓고

하늘 관을 이고

설한풍 속 추상으로 서 계시다

 

현과 현 사이

바람처럼 들락이는

마른 울음

때로는

배경이 되고

깊은 풍경이 되기도 하면서

 

듣는 이

보는 이 하나 없는

한밤에도 환하다

반듯하고 꼿꼿하시다.

        

 

한라산을 마시다

 

제주 표선 바닷가에 홀로 앉아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한라寒裸한라산漢拏山을 마신다

백옥의 관을 쓰고

빙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한라산

조근조근 말을 걸어오는 바다

한 해가 저무는 섣달 보름

다 저녁 때

산록에서는 사슴들 소리 뛰어놀고

한란寒蘭의 청향淸香이 가슴으로 흐르는데

차밭에서는 날아오는 눈 맑은 바람 따라

때로는,

우리도 1,950m 높이쯤은 취해야 한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명명明明하다면

차라리 바닷속으로 뛰어들 일이다

한라산이 뛰어드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불륜不倫/佛輪인가

몸속에서 한라산바다가 출렁인다

이제 제주엘 간다 해도

한라산은 올라갈 수 없다

내 몸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파문波紋

 

1

 

나무는 서서 몸속에 호수를 기른다

 

햇빛과 비바람이 둥근 파문을 만들고

천둥과 번개가 아름답게 다듬어

 

밖으로 밖으로

번져나간다

 

파문이 멎으면 한 해가 간 것이다

 

2

 

잎 나고 꽃 피어 열매를 맺는 동안

속에서는 물이랑을 짓다

 

열매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나무는 일 년을 마무리하고

 

제 옷을 벗어 시린 발등을 덮고 나면

가지마다 악기가 되어

 

겨울을 노래 부를 때

하늘도 투명한 파문이 이는 호수가 된다.

 

 

            산림문학2018년 봄호(통권29, 사단법인 한국산림문학회)에서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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