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스크랩] 홍해리 시인의 `치매행(致梅行)`

洪 海 里 2018. 3. 16. 06:32



세월이 약이니까

    -치매행致梅行 · 261

 

철석같은 약속도

세월이 가면 바래지고 만다

 

네가 아니면 못 산다 해놓고

너 없어도 잘만 살고 있느니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세월이 좀먹고 세월없을 때도

되는 일은 되는 세상

 

세월을 만나야 독이 약이 될까

색이 바래듯 물이 바래듯

세월이 약이 될까, 몰라    


 

 

죄받을 말

    -치매행致梅行 · 262

 

아픈 아내 두고 먼저 가겠다는 말

앓는 아내를 두고 죽고 싶다는 말

 

하지 말아야하는데

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왜 자꾸 이러는지

어쩌자고 점점 약해지는지

 

삶의 안돌이 지돌이를 지나면서

다물다물 쌓이는 가슴속 시름들

 

뉘게 안다미씌워서야 쓰겠는가

내가 지고 갈, 내 안고 갈 사람    


 

 

금쪽같은

   -치매행致梅行 · 263

 

세월은 막무가내 흘러가는데

가는 데가 어딘지 알 수 없어

 

마음 열고 멀리 바라다보니

빛이 환하다, 꽃도 피었다

 

틈이 있어야 볕이 들고

귀가 열려야 파도가 밀려오듯

 

아내여, 잎도 띄고 귀도 벌리기를,

금쪽같은 인생 감쪽같이 사라지나니

 

하루 종일 누워서 무슨 생각을 하나

매화 만발한 봄동산을 그리고 있나.    


 

 

마지막 편지

    -치매행致梅行 · 264

 

마음을 다 주었기로

할 말 없을까.

 

천금보다 더 무거운

물 든 나 뭇 잎 한 장 떨 어 진 다.

 

얼마나 눈부실까

내 주변만 맴돌다,

 

아내는 지쳤는지

다 내려놓고 나서,

 

마지막 가슴으로 찍는 말

무언의 할말없음!’

    

 

  


밑이 빠지다

    -치매행致梅行 · 265

 

아내가 알약을 삼키지 못해

막자와 유발乳鉢을 사왔는데

 

알약을 넣고 몇 번 찧고 빻다 보니

밑이 빠져 버렸다

 

쓴 약을 쓴 줄도 모르고 받아먹는 아내

쓰지?” 해도 그냥 웃고 마는 아내

 

약이 쓴지 단지 아는지 모르는지

미주알고주알 밑두리콧두리 캘 것 없지만

 

바람 부는 날 밑싣개 타고 흔들리다 보니

어느덧 나도 밑 빠진 막자사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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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자 : 乳棒

*막자사발 : 乳鉢

    

 

  


씹어 삼키다

    -치매행致梅行 · 266

 

평생 누굴 한번 씹어 본 적 없는데

아내는 음식물 씹는 걸 잊었습니다

 

남의 물건 꿀꺽해 본 일 없는데도

물 삼키는 것도 잊어 버렸습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라서

마음이 이내 무너지고 맙니다

 

눈시울이 뜨거워

소리 없이 흐느끼다 눈물을 삼킵니다

 

마지막이라는 말

끝까지 간다는 것.

    

 

  


이제 그만

    -치매행致梅行 · 267

 

주변에서, “이제 그만!”

아내를 요양시설에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어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

곁에 있어 주는 것도 감사한 일

 

이제껏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빈손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습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견뎌내고

가는 데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멍하다

   -치매행致梅行 · 268

 

, 나갔다 올께!”해도

아내는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합니다

 

나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돌아섭니다

아내의 말 없는 말을 번역할 수가 없어

 

나는 반역자처럼 아내 곁을 매암돌다

그 자리를 벗어납니다

 

집 안의 해인 우리집사람’, 나의 아내여

어찌하여 내 뒷덜미도 쳐다보지 않는가

 

얼빠진 내가 허공에 떠서 흔들립니다

, , 볕이 없는 해가 지고 있습니다.

    

 

  


늙마의 길

    -치매행致梅行 · 269

 

나이 들어도 나일 먹어도

기쁜 것은 기쁘고 슬픈 건 슬픔이듯

늙어도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여전히 싫기 마련입니다

오늘 아내가 중환자실에 들었습니다

앵앵대는 구급차를 타고

당당히 한일병원에 입성했습니다

다섯 시간 동안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습니다

환자는 의사의 실험대상입니다

이것을 해 보자 하면 따라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두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빙 둘러싸인 채 모처럼 아내는 호강을 누렸습니다

다들 돌려보내고 나서

코에 끼운 관[tube]으로 저녁을 때우고

고롱고롱 잠이 들었습니다

혈액검사 소변검사 심전도 검사

CT, X-ray, MRI 촬영이 힘들었나 봅니다

병상 옆 긴의자에 나란히 누워

매화동산으로 산책을 나가다 보니

입원 첫날밤이 희붐하니 새고 있습니다.


 

 

늙마의 노래

    -치매행致梅行 · 270

 

아내를 병원에 두고 돌아와

그간 입었던 땀에 전 옷을 빱니다

이 옷을 아내가 다시 입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또 입혀 줘야지 하며 빨래를 넙니다

아내의 껍질 같은 옷이 줄을 잡습니다

운동장을 가로지른 만국기처럼

하늘마당에 아내가 펄럭입니다.

    

 

              * 우리3월호(통권 357) ‘홍해리 시인의 연재시에서

                   * 사진 : 요즘 제주시내를 환히 밝히고 있는 목련꽃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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