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의로 꽤 유명한 나도 (인지증을) 체험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강연 등을 통해 내 체험을 전하면 인지증이라 해도 보통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면 인지증 환자가 안심하고 살아갈 환경 만들기에 도움이 된다.”
그는 “나이가 든다는 것, 에이징(aging)은 탄생 직후부터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라고 강조한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빠르건 늦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을 중심으로 한 돌봄이 이뤄질 수 있다.” 하세가와 박사는 영국 심리학자 톰 키트우드가 1997년 저서에서 제창한 ‘퍼슨 센터드 케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상대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같은 눈높이에서 접하는 돌봄의 자세를 말한다.
―2년 전부터 증상을 자각했다고 들었다. 예전과 지금, 달라졌다고 느끼나.
“확실하지는 않지만 바뀐 것 같다. 내가 자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한 것, 말한 것, 행한 것이 확실하지 않아졌다는 점이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잘 모르게 된다. 주위에 몇 번이나 물어보고 달력 보고 생각해낸다. 그래서 요즘은 하루씩 날짜를 뜯어내는 달력을 쓴다. 열쇠 잠그고 외출하려다가 ‘잠갔나?’ ‘아, 괜찮아’ 이건 보통사람이다. 인지증이 되면 자꾸 확인하고 싶어진다. 몇 번이나 돌아가 확인하니 시간이 걸리고 결국 외출을 못하게 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병원을 찾았고 80세 이상 노인들에게 많은 과립성 인지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건망증이 심해지고 완고해지지만 진행은 매우 느리다.
“인지증은 나이가 들수록 늘어난다. 일본의 경우 60대 후반에 3% 정도인 유병률이 80대 후반에서는 약 40%, 95세 이상에서는 80% 정도로 올라간다. 100세가 돼도 인지증이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극히 일부의 특수한 경우다.”
대개의 인지증은 근 10년에 걸쳐 진행된다. 첫 3년간은 시간이 애매해지고 그 다음 3년은 공간이 확실하지 않게 되며 다음 3년은 사람을 못 알아보게 된다. 그의 경우 시간 개념이 애매해진 상태다. 하세가와 박사는 “약을 먹고 있으니 이 단계에서 멈추고 나머지는 저 세상에서 진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환자가 되어 새로 발견하는 점이 있는가.
“평소 데이케어센터에 다니라고 환자들에게 권해왔는데 내가 가게 됐다. 지난해 6월 넘어져서 팔꿈치가 부러진 뒤 매주 하루씩 다녔다. 일하는 사람들이 이용자 한 명 한 명의 정보를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공부했다.”
―과거 본인의 진료에 대해 후회는 없는가.
“인지증이라고 진단받은 한 남성이 내게 ‘다른 사람이 아니고 왜 저입니까’라고 절박하게 물은 적이 있다.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손을 잡고 ‘정말 그렇네요…’라고 끄덕여주는 수밖에. 지금은 그의 마음을 훨씬 잘 알 것 같다. 그래도 같은 대답밖에 못하겠지만….”
1974년 그는 9가지 질문으로 인지증 여부를 측정하는 간이 진단테스트 하세가와 스케일을 개발했다. 이 진단기준은 지금도 전 세계 임상현장에서 널리 사용된다. 누가 검사해도 거의 같은 진단결과가 나오는 게 특징이다.
―2004년 일본 정부는 치매라는 용어가 차별적이라며 인지증으로 바꿨다. 이 과정을 주도하신 걸로 안다. 치매를 인지증이라 부르는 게 맞는가. 인지능력에 장애가 생긴 것이니 인지장애가 정확하지 않을까.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런데 치매는 두 글자, 인지증은 세 글자다. 알츠하이머는 일본어표기로는 7글자를 써야 한다. 효율성을 생각해서 인지증으로 했다. 인지증은 알츠하이머병, 노인성 치매, 파킨슨병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일본에서는 인지증 카페가 속속 생겨나고 환자 가족회 활동도 활발하다. 환자를 돕는 교육의 일종인 인지증 서포터스 자격증을 받은 사람이 1000만 명이 넘었다는 소식도 있다.
“일본도 매우 비참한 체험을 많이 했다. 1970년대만 해도 시골에 가면 인지증 노인을 집안의 수치라고 여겨 헛간 같은 곳에 가두고 숨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신과 병원이나 노인병원에 입원시켜 팔이나 허리를 묶기도 했다. 격리와 수용과 구속의 시대였다. 그게 오랜 세월에 걸친 노력 끝에 생활 속 케어로 바뀌고 있는 거다.”
2025년이면 일본의 치매 환자는 73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인지증 환자들이 사회와 어울려 살아가는 데 초점을 둔 돌봄 정책들이 시도되고 있다.
―인지증 환자가 있으면 아무래도 주변이 불편하거나 어려움이 생긴다. 무조건 이해해주고 함께 안고 가는 수밖에 없는가.
“인지증의 본질은 지금까지의 생활이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당사자에게는 무척 괴롭고 슬픈 경험이다. 주위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지원해주는 게 중요하다. 주변의 대응에 따라 어려운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기도 한다.”
―조기 진단이 진행을 늦출 수 있다는데….
“원인을 아예 없애고 본래 상태로 되돌리는 약은 없지만 진행을 늦추는 약은 개발돼 있다. 초기에 발견할수록 효과적이다. 잘 복용하면 더 이상의 악화를 막을 수 있다.”
―의학이 발달하면 언젠가는 치료약도 나올 거라는 기대가 크다.
“글쎄, 노화를 되돌리는 약이 없는데 뇌의 노화만 막을 수 있을까. 뇌 속에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 나이와 더불어 늘어나는 것은 자연현상이다. 이걸 없앤다는 건 자연에 역행하는 게 된다. 언젠가 그런 약이 개발될지 모르지만 부작용이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늙는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는 치매국가책임제를 시행한다고 한다. 가능한 일일까.
“국가가 본격적으로 인지증을 관리하겠다는 자세를 국민에게 보이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잘하는 일이라 본다.”
그는 9세 연하의 부인과 둘이 생활하고 있다. 일상에 대해 묻자 “매일 야단맞는 생활”이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매일 오전 6시 반에 기상해 요청이 있으면 모임에 나가고 동네 찻집에도 가고 산책도 즐기는 노년의 삶을 즐기고 있다. 인지증 돌봄 연구연수 도쿄센터 명예센터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앞으로 계획은….
“가능한 선에서나마 사회나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무엇보다 인지증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싶다.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게 하다가 죽으면 쉬려 한다(웃음).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른다. 두려움도 있다.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나머지는 운명에 맡기고 오늘을 살아간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국제알츠하이머병협회의 추계에 따르면 인지증 진단을 받은 사람은 2015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 4700만 명. 2050년에는 1억3000만 명 이상이 된다고 한다. 한국은 고령화율 7%(2000년)인 고령화사회에서 14%(2017년)인 고령사회에 이르는 데 불과 17년이 걸렸다. 1970년부터 1994년까지 24년 걸린 일본보다 빠르고 프랑스의 114년, 스웨덴의 82년, 미국의 69년에 비하면 엄청난 속도다. 앞으로 고령자도 인지증도 급증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제대로 준비가 돼 있는 걸까.
1953년 도쿄 지케이카이(慈惠會) 의대 졸업, 미국 세인트 엘리자베스병원 등에서 정신의학, 뇌파학 전공
1969년 지케이카이 의대 조교수
1974년 하세가와 스케일 개발
1991년 하세가와 스케일 개정판 발표
1996년 성마리안나 의대 학장
2005년 일본 정부 훈장 서훈
2009년 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