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이별은 연습도 아프다』(2020)

그때 - 치매행 致梅行 · 337

洪 海 里 2018. 9. 22. 03:28

그때

- 치매행致梅行 · 337


洪 海 里



아내가 걸을 수 있었을 때

한 발짝 앞세우고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가게 했던 적 있습니다

"왼쪽?", "오른쪽?" 하면

갈 길을 손으로 가리키곤 하던 때

그때만 해도 좋았습니다

볼펜을 달라 하면 가위를 가져오고

신문을 가져오라 하면 시계를 주던

그때,

자신에게서 기억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갈 때

그것도 모르던 아내는 얼마나 망연했을까

나는 또 얼마나 막막했던가

언제부턴가 하나씩 포기하고

자위하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힘들어도 이해하고 수용하자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얼마나 세월이 길었던가

아직도 갈 길은 멀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날 리가 있겠습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허섭스레기 같은 일뿐

저쪽 세상이 너무나 황량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