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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洪 海 里 2019. 2. 2. 18:05

    난초


  난초는 사람이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자라는 게 보통이다.

향도 은은하게 멀리까지 퍼지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선비에 비유하기 좋은 식물이다.


〈부작난도〉 김정희, 19세기, 종이에 수묵, 55.0x30.6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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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초를 많이 그린 추사 김정희 선생은 난초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우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 공부를 하지 않고 그린 난초는 난초 그리는 것을 흉내 낸 데 불과하다 여겼다. 이분의 기준이 얼마나 엄격했는지 매화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던 조희룡에 대해서도 가차 없었다. 조희룡은 추사의 제자였고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 갈 때 일당으로 여겨져 전라도 임자도로 유배되기까지 했다.

  추사는 이런 조희룡에 대해, '그는 나의 난초법을 배웠지만 난초 그리는 흉내를 면하지 못했다.'라고 딱 잘라 비판했다. 사군자 그림 가운데 흔히 난초 그림이 가장 쉽고도 어렵다고 한다. 감상하기도 마찬가지다.

  대나무는 똑바로 곧게 올라가는 것이 선비 같다고 했고, 국화는 가을에 서리가 내리는데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점에서 또 꿋꿋한 선비에 비유되었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이 네 가지 그림은 한국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그려졌다. 그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려 시대 기록에도 매화와 대나무 그림이 그려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네 가지를 한데 묶어 사군자라고 부른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말기 그러니까 17세기 들어서 사군자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사군자라는 용어가 널리 일반에 퍼진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난초를 그린 그림, 대나무를 그린 그림 등을 한데 모아 전시하면서 이것들을 통칭해 부를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의 난초 그리는 법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 가 있을 때 아들 상우는 아버지에게 난초를 그릴 종이를 많이 보냈다. 그랬더니 추사 선생이 '얘야, 난초 그리는 것은 이렇게 많은 종이를 써서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장을 쓰며 난초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추사 선생은 난초 그리는 것은 서예에서 예서(隸書) 글씨를 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예서란, 요즘은 없어진 한자의 옛 글씨체인데 쓰지 않는 글씨라서 이를 쓰려면 꽤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추사 선생이 '난초를 그리는 것이 예서를 쓰는 것과 같다'고 한 말은, 책을 많이 읽어 교양이 쌓여야 남을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저절로 좋은 난초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난초 그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