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시집 『무연고』
책 / 李生珍
어떤 책을 읽어도
지금의 나만 못하다
고독도
아픔도
나보다 못하다
그렇다고 내가 책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종이가 아니다.
그렇다는 것뿐이다
이상하다
매일 그런 생각으로 방 안이 가득하다
나 같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다.(p21)
시 쓰는 남자들끼리 / 이생진
결국 노상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홍해리 시인과 나는 띠동갑이다
해리는 자칭 독사라 했고
나는 자칭 꽃뱀이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서로 껴안고 길바닥에서 울었다
그럴 사정이 있었다
아내 때문인데
그의 아내는 지금 몇 년째 치매로 앓고 있고
나의 아내는 한 두 해 앓다 갔다
그것 때문에 운게 아니다
세상 모르고
행복이 뭔지 모르고
아내가 뭔지 모르고
섬으로 섬으로 돌아다니며
해리 시인은 난초를 보고
나느 고독에 취해 섬으로 섬으로 떠돌다 아내를 잃은 것 같아
가다 말고 울어버린 것이다
둘이 껴안고 울다가
술집으로 들어가 막걸리를 권하며 흐느낀 것이다.
말년에 무슨 날벼락이냐고
하지만 따뜻해지면 한 열흘쯤 섬으로 떠돌며
섬 타령이나 하자 했다
늦은 겨울밤 헤어지지 않고 손을 흔드는
독사와 꽃뱀
독사는 77이고
꽃뱀은 89
아 세월아
세월아 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p42)
시인은 정직한 언어로 시를 쓰고 있다. 시는 인생이 되어서 하얀 종이 위에 휘날리게 된다. 구순을 앞두고 쓰는 섬 시인 이생진님은 자신의 삶을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비추면서, 삶에 대해서 관조하고 있다. 살아온 날보다 남아 있는 날이 더 적은 예측 불가능한 삶에 대해서, 저자의 내면 깊숙이 감춰져 있는 불안한 자아가 엿보인다.시인이기 전에 남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자월도에서 굴을 캐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쓸쓸한 여느 시인의 잿빛 그림자가 시 안에 투영되고 있다.
이 책은 정직하다, 그리고 솔직하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유언장을 쓰는 것처럼 시 속에 자신의 삶의 남은 여생을 기록해 나가고 있다. 자신보다 더 오래 산 사람보다 적게 산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건, 현재 자신 앞에 놓여진 문제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적다는 거다.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마음은 마음뿐이라는 걸 시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더 나아가 삶 속에서 저자의 소소한 소확행도 엿볼 수 있었다. 가난했지만 책을 사는 것을 놓치지 않았던 저자의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하게 되었으며, 남아 있는 삶이 적다는 걸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이 되면, 그 어떠한 논쟁도 무의미해졌다.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와 논쟁하는 그 시간조차 그들에겐 아깝기 때문이다. 돌이켜보자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쓸데없는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하고 있다. 구순을 앞에 둔 저자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내 삶을 반성해 보았다. 작은 것에 연연해 하지 말며, 내 앞에 놓여진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그 당연한 진리를 놓치고 살아가는 내 모습이 자꾸만 호숫속 물가에 투명하게 비춰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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