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리 선생님의 시선집,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도서출판 움, 2017)
소금과 시
소금밭에 끌려온 바다가
햇볕과 바람으로 제 몸을 다 버리고 나서야
잘 여문 소금이 영롱하게 피어난다
맛의 시종인, 아니 황제인 소금의 몸에서
밀물과 썰물이 놀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소금을 기르는 염부의 등을 타고 흘러내린
수천수만 땀방울의 울력으로
바다의 꽃, 물의 사리인
가장 맛있는 바다의 보석이 탄생하듯이,
시인은 말의 바다를 가슴에 품고
소금을 빚는 염부,
몇 달 몇 년이 무슨 대수냐면서
한 편의 시는 서서히 소금으로 익어간다.
어둔 창고 속에서 간수가 빠져나가야
달고도 짠 소금이 만들어지듯
서둘지 마라,
느긋하게 뜸을 들이며
가슴속 언어산의 시꽃은 열매를 맺는다.
----"바다의 꽃, 물의 사리"!! 얼마나 입에 착! 붙는지!
"시인은 말의 바다를 가슴에 품고 / 소금을 빚는 염부"!!
두고두고 기억할 표현.
지는 꽃을 보며
외롭지 않은 사람 어디 있다고
외롭다 외롭다고 울고 있느냐
서산에 해는 지고 밤이 밀려와
새들도 둥지 찾아 돌아가는데
가슴속 빈자리를 채울 길 없어
지는 꽃 바라보며 홀로 섰느냐
외롭지 않은 사람 어디 있다고
외롭다 외롭다고 울고 있느냐.
----지는 꽃을 보며 서 있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인.
그래, 누구나 언제건 이런 마음이 드는 때가 있을 것이다.
타작
엊저녁에는 밤새도록 깨를 털었다
깻단을 두드리지 않아도
깨가 두두둑두두둑 쏟아져내렸다
흰깨 검은깨
볶지 않아도 고소한 냄새
방안에 진동했다
날이 희부옇게 새었을 때
머리맡에 놓인 멍석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시의 씨앗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런 날 밤이면
하늘에는 깃밝이까지 잔치가 벌어지고
별들이 마구 뛰어내렸다
아침이 되자
깨가 쏟아질까 쏟아질까
키를 들고 시를 까부르고 있었다
까불까불.
----시 쓰는 일의(아침에 다시 보니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았다. 시가 나왔다. 깨알들이 쏟아지듯 밤새 시가 떨어져내렸다.) 즐거움을 이렇게 생생하게 절묘하게 표현한 시를 나는 보지 못했다. 마지막 "까불까불"은 시집에서 페이지가 바뀌어 있다. 시집을 읽다가 페이지를 넘겨 이 네 글자를 만났을 때 나는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아주 오래 흐뭇하게 웃었다. "까불까불"이라니!!
호박
한 자리에 앉아 폭삭 늙었다
한때는 푸른 기운으로
이리저리 손 흔들며 죽죽 뻗어나갔지
얼마나 헤맸던가!
방방한 엉덩이 숨겨놓고
활개를 쳤지
때로는 오르지 못할 나무에 매달려
바둥거리기도 했지
사람이 눈멀고 반하는 것도 한때
꽃피던 시절
꺽정이 같은 떠돌이 사내 만나
천둥치고 벼락치는
날갯짓 소리에 그만 혼이 나갔겠다
치맛자락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지
숱한 자식들 품고 살다 보니
한평생이 별것 아니더라고
구르는 돌맹이처럼 떠돌던
빈털털이 돌아 아범 돌아와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을 뱉고 있다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 돌담 위에 앉아 계신다.
---주택에서 2년을 산 적이 있다. 작은 마당에 해바라기, 채송화와 함께 호박을 심었다. 호박 덩쿨이 타고 오를 작대기를 세워 주는 걸 몰랐다. 마당이 온통 호박 덩쿨과 잎으로 뒤덮혔다. 여름에 비 내릴 때 소리는 장관이었다. 호박이 자랄 때 흙땅이 아닌 곳에는 호박 밑에 신문지나 종이를 깔아주어야 하는 것을 또 몰랐다. 물러가기 시작할 때야 이웃집 할머니께서 혀를 쯧쯧 차며 알려주셨다. 호박은 놀랍게도 잘 자라 노랗고 쭈글쭈글한 늙은 호박이 되었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따지도 않고 그냥 놓아둔 결과였다. 결국 이웃집 할머니들이 오셔서 하나씩 들고 가셨다. "호박" 시를 읽는데 그 호박들이 살아왔다.
흩동백꽃
내가 한 가장 위대한 일은 너에게 '사랑해!' 라고 말한 것이었다
젖은 유서처럼
낮은 울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네 입술이 내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나를 덮는 한 잎의 꽃
아지랑이 아지랑이
---누구라서 한세상 가슴속 절절한 사랑 하나 없을까만, 시인께 제대로 깊고 아픈 사랑 하나 지닌 것을 알겠다,고 하면 외람될까. "젖은 유서"라니! 한 존재 전부를 감싸는 입맞춤은 얼마나 감미로울까.
깜깜한데 맑고 맑은 밤에 읽고 쓰며 기억하며 웃는다.
시를 읽으며 이럴 수 있으면 뭘 더 바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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