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홍해리 시집『치매행致梅行』읽기 / 여국현(시인)

洪 海 里 2020. 5. 21. 06:59

오늘도 한 권의 시집을 읽는다. 아니 삶을 본다.
일흔여덟 노시인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부인에게 바친 연서.

시집 제목이 <치매행致梅行--아내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사랑 고백>(홍해리, 황금마루, 2015) 이다. 치매(癡呆)가 아니다.
까닭은 동봉한 "시인의 말"을 참고하시길.

150편의 시가 두툼한 시집 한 권을 채우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소넷 연작시 Sonnet이 154편,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는 테니슨의 In Memorium이 134편이라는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사랑이건 죽음이건 한 존재의 삶을 제대로 사랑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마음 시간은 들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달리 말이 필요없다.
해에 무슨 조명이 달리 필요할까.
삶이 그저 글이 되고,
그 글이 그저 시가 되는 순간을 산다는 것,
누구에게도 아프기만 한 일은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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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저녁때
-치매행致梅行 1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러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귀목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 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손톱깎기
--치매행致梅行 5

맑고 조용한 겨울날 오후
따스한 양지쪽에 나와 손톱을 깎습니다
슬며시 다가온 아내가 손을 내밉니다
손톱을 깎아 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냥 손을 내밀고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겨우내 내 손톱만 열심히 잘라냈지
아내의 손을 들여다본 적이 없습니다
손곱도 없는데 휴지로 닦아내고 내민
가녀린 손가락 마다
손톱이 제법 자랐습니다
손톱깎이의 날카로운 양날이 내는 금속성
똑, 똑! 소리와 함께 손톱이 잘려나갑니다
함께 산 지 마흔다섯 해
처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손톱을 잘라 줍니다
파르르 떠는 여린 손가락
씀벅씀벅,
눈시울이 자꾸만 뜨겁습니다.


주소를 지우다
---치매행致梅行 11

소식을 보내도 열리지 않는 주소
아내의 이메일을 지웁니다
첫눈은 언제나 신선했습니다
처음 주소를 만들 때도 그랬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 눈이 사로잡은 아내의 처녀
아직도 여운처럼 가슴에 애련합니다
이제는 사막의 뜨거운 모래 위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내 사랑입니다
열어 보고 또 열어 봐도
언제부턴지 받지 않는 편지를 쓰는
내 마음에 멍이 듭니다.


노래
---치매행致梅行 33

눈물로 노래를 씻어 부르면
노래마다 구구절절 빛이 날까
눈썹 끝에 별을 달고
홀로 가는 길
별 내린 풀숲에서
실을 짜 엮고 있는 풀벌레들
계절은 가릉가릉 현악기로 울리고
달빛 타고
하늘 가득 날아가는 기러기 떼
허공중에 떠가는
수많은 섬이구나
날갯짓마다 파도가 일어
가을이 젖는데
내 저 섬을 비추는 등대라면
하늘길 안내하는 불빛이라면!


허수아비
---치매행致梅行 42

사내도 때로는 나락에 떨어져 울고 싶은 때가 있다
오동의 속살을 밤새도록 손톱으로 파는 밤이 있다

한평생이 독같이 외로운 어둠의 길이어서
울리지 않는 은자의 북을 두드리면서,

홀로 고요해지고 있는 저 들판의 저녁녘
너덜거리는 옷때기 한 자락 걸치고 있는,

나는 가슴 텅 빈,
허수어미의 허수아비.



백야
---치매행致梅行 125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
너무 머나멉니다
마음에서 몸으로 가는 길도
너무 힘듭니다

걱정에 젖어 잠이 오지 않고
근심으로 꿈이 산산 달아납니다
잠을 가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당신이 내게 무엇이었는가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었는가
생각하면 눈물부터 핑, 도는
바라보면 울컥해서 가슴만 아픈

오늘 밤도 달이 뜨지 않는데
뿌연 하늘 아래
눈먼 이를 이끌고 가는
장님 사내 하나 있습니다




---치매행致梅行 150

그대가 그리우면
그대 곁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래도 그대가 그리우면
그대 손을 가만히 잡아 봅니다

그래도 또 그대가 그리우면
그대 몸에 살며시 손을 댑니다

그대의 몸에 몸을 대고 있으면
나는 그대로 물이 됩니다

그리 하여, 그리 하여
그대 속으로 서서히 스며듭니다

그러면, 나는
그대와 하나가 됩니다

그대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그대를 향해 가는 길이 납니다

그대에게 가는 길마다
빛이 쌓이고 쌓여 꽃이 피어납니다

그 꽃이 피워내는 향이
천상에까지 가득 차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