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호박 / 김포신문 2022. 09. 16.

洪 海 里 2022. 9. 19. 14:59

김포신문 2022. 09. 16.

<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호박

洪 海 里



한 자리에 앉아 폭삭 늙었다

한때는 푸른 기운으로
이리저리 손 흔들며 죽죽 뻗어나갔지
얼마나 헤맸던가!
방방한 엉덩이 숨겨놓고
활개를 쳤지
때로는 오르지 못할 나무에 매달려
버둥거리기도 했지
사람이 눈멀고 반하는 것도 한때
꽃피던 시절
꺽정이 같은 떠돌이 사내 만나
천둥치고 벼락치는
날갯짓 소리에 그만 혼이 나갔겠다
치맛자락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지
숱한 자식들 품고 살다 보니
한평생이 별것 아니더라고
구르는 돌멩이처럼 떠돌던
빈털털이 돌이 아범 돌아와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을 뱉고 있다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 돌담 위에 앉아 계시다.

- 시집『황금감옥』(2008, 우리글)

 

 

 

* 감상

밭에, 산길에, 아파트 화단에, 노란 호박꽃이 피었다. 중간중간 애호박도 보이고 늙은 호박도 보인다. 가을이다. 본문의 말처럼 한평생이 별것 아니다. 한자리에 앉아 하나둘 품고 살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 오고 한 계절이 간다.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간다는 노랫말이 유독 공감이 간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그랬듯 나도 별일 없이 한 자리에서 익었으면 좋겠다. 노랗게. 한평생. 살다 보니 정말 별것 아니다. 선하게 살면 된다. 웃거나, 웃음을 주거나다. 맘 편하게 폭삭 늙어보면 안다.

- 김부회(시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