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불통
- 치매행致梅行 · 121
洪 海 里
남편이나 자식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송두리째 잊어버리는 사람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가, 너무
속이 상해서
속이 다 타서
뭉그러진 마음으로 생각, 생각에 젖다
여보! 하고 부를 수 있고
함께 있는 것만도 복이지 싶어
안타까운 마음을 접으려 애를 써봅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왜, 하는 원망도 덮고
우리의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아도
그냥 바라다보려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촛불을 밝혀도
등불을 내걸어도
세상은 칠흑의 황야입니다
한여름인데 겨울옷을 입고 나서는 아내
막무가내 옷을 갈아입으려 들지 않습니다
끝내,
내가 지고 만 채 유치원 차에 태웁니다
아내의 세상은 한여름에도 추운가 봅니다.
* 제가 나가고 있는 서울 중구문화원 시 창작반에서 한 수강생으로부터
시집 한 권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쓴 시집이 아닌데 주는 경우는 좀 드문 일이어서 집에 가져와
읽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 시집은 치매癡呆를 앓는 아내를 간병하며 쓴 150편의 시입니다.
시인의 말에서 "치매는 매화에 이르는 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중국 한漢 대의 악부시樂府詩에서 나온 시체의 일종인 행行을
제목 뒤에 붙였습니다.
자신 역시 '사랑하는 아내를 십수 년 투병 끝에 먼저 천국으로 보낸'
임채우 시인은 '치매환자를 돌보는 보호자의 입장에서 수많은 희비로
엮으신 이 시편은 우리의 시문학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발문에서 쓰고
있습니다.
월간《우리詩》에 연재한 작품들을 묶은 이 시집을 시인은 전국의
요양시설에 나누어드려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치매는 이제 우리 곁의 가까운 질병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인이 눈물로 쓴 이 시편들이 치매 가족들의 고통을 위로했으면 합니다.
모처럼 읽은 감동적인 시집입니다.
- 유 자 효(시인) / 《See시詩》(2016. 10월호)
-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 / 유자효 지음. 문화발전소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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