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화사기花史記』1975

시집 『花史記』 발문 / 양채영

洪 海 里 2005. 11. 3. 06:31

<발문>

 

시집『화사기花史記』 

 

梁 彩 英 (시인)


  내가 洪兄을 알게 된 것은 한 십년 되지 않나 한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랫
동안 우의를 지켜온 일이 서로 고마울 뿐이다.
  내게 이 어려운 글을 맡겼을 땐 아무래도 내 필력으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찌 생각하면 그가 좋아하는 술 한잔을 하며 나누는 부담없는 얘기 정도로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어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쓸데없는 사족임이 분명한 이 발문이 그에게 누나 끼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늘 그를 만나면 그의 시단 데뷔에서 남다른 수난을 겪어야 했던 서러운
이야기를 생각하곤 가슴 아픔을 느낀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시에 대해 
가지는 집념이나 오기는 악착같은 것이 있다.
  그는 제1시집 『投網圖』 이후 많은 작품을 발표해서 그의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하였으며 한 시인으로서의 지반을 확고히 했다.
  한때 그의 고향인 청주에 있으면서 나와 자주 만났던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내륙 지방의 문학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열을 올리곤 했다.
  지금은 충북 유일의 동인지로서, 또는 이 지역 동인지의 효시로서 그 명맥을
잇고 있는 『內陸文學』의 탄생도 실은 그의 이와 같은 몸살과 나의 작은 착상에
의해 실현되었던 것이다.
  마른 듯한 체구와 중키에 속하는 까만 테의 안경장이, 곱슬머리에 즐겨 입는
홈스펀의 스타일은 낯설지 않은 이방인을 연상ㅎ게 한다.
  그의 부지런함과 열기는 저 곱슬머리와 빛나는 안광 속에서 번득인다. 그가
정신없이 퍼대는 술버릇도 바로 뜨거운 그의 성품의 한 편린인 것이다.
  제1시집 <『投網圖』에 실린 <善花公主>나 <善德女王>에서 신선한 관능의 육화를
우리의 지고했던 역사 속의 여성에서 찾아내고 있는 일은 멋있고 구미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오늘의 말초신경적 관능미의 범람 속에서는 건전한 우리의 정신문화를
위해서도 관심해 볼 만한 일인 것 같다.

   물거품 말아 올려 구름 띄우고
   바닷가운데 흔들리는 순금 한 말
                   ---<善花公主>의 일부

   구름만 데리고 노는
   海岸線을 종일 바라보다가
                   ---<善德女王>의 일부

  이 시에서 보이는 바 가히 절창에 속하는 그의 결곡한 시어가 짜낸 事象의
신선감과 그것들이 거느린 안정된 정서의 깊이와 빛나는 공감영역은 그의 시의
줄기이며 뿌리이다.
  이와 같은 그의 감각적 시어의 조직과 밝은 관능에의 관심은 제2시집 『花史記』
에서도 대부분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수(繡)를 놓는
   아내의 잠은 항상 외롭다
   수틀 속 물오른 꽃대궁마다
   태양이 껴안겨 있다
   손마다 가득 괴는 가슴의 설움
   병처럼 깊어 더욱 외롭다
   고물고물 숨쉬는 고요
   사색의 이마는 꽃보다 고운 
   여름의 꿈이 맺혀 있다
   꽃은 죽어 여름을 태우고
   꿈보다 예쁜 불을 지피고 있다.
             ---<花史記>의 제5부

  좀더 그의 시는 내향적이고 사적인 점에서 불안하지 않으며 事象에 대한
날카로운 투시와 겸손한 태도로서 선택하고 있는 시어와 적절한 기교는 읽는
이에게 스스로 자기에게 알맞는 보석을 한 개씩 간직하도록 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밝고 단단한 審美意識은 좀더 근원적인 죽음에의 관심을 
공유함으로서 더욱 확대된다.

   그것은 영원한 미완의 회화
   나의 눈은 언제나 허전하다
   죽음과도 친한 나의 잠
   나의 꽃밭은 텅 비어 있다.
             ---<花史記>의 끝부분

  그는 아름다운 꽃의 허망함을 인식하며 영원한 미완의 회화로서의 꽃을 볼 
줄 알며 저 아름다움의 밑바닥에 깔린 검은 빛깔의 절망감이나 체념이나
눈물들을 꿰뚫어 봄으로써 쾌적한 생기를 불러 일으키는 아름다움으로 환치
시켜 놓는 일에 공헌하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변용과 근원적(?) 미의식의 심화는 결국 추상성이란 것에서
벗어나기 힘든 일이나 그는 그것을 잘 극복해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적 역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이승의 잠 속에 접어두고
   가벼이 날아가다 보면
   시월 상달 山茱萸 열매를 적신
   새벽 이슬도 빠알갛게 물이 들었다
   -------중 략-------
   잠 속에 열려진 대문을 나섰더니
   날새도 발소리 죽인 허허론 모랫벌을
   잠 깨어 눈을 부비듯
   짧은 추억의 그림자로 문대고 있는
   파도 소리.
              ---<새벽의 꿈>의 일부

  그의 환상이 육화 되어가는 과정을 좀더 주변적인 체험과 추상성의 초시간적
공간 사이를 적절히 내왕함으로써 허황된 언어의식에서 구제되어 있으며
날카로운 직관력과 대상에 대한 재빠른 전면 파악, 세련된 감성에서 얻어진
건강한 시어들은 갓 빚어낸  정육처럼 신선한 빛과 향기를 지니고 있어 설득
력을 얻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시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점을 저바리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아마 그의 시가 좀 신경적인 것은 이것을 너무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신경성이야 말로 한 사람의 시인이 작품
앞에 놓여질 때 긴장하지 않으면 안될, 바꿔 말하자면, 시인의 성실성과 겸손,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시인은 그 긍지에 있어서 오만해야 하겠지만 작품에 있어선 정직하고 겸손할
때 그 시는 더욱 단단하고 뿌리 깊은 한 그루 나무처럼 우리들의 가슴에
감동을 뿌리 내려 꽃피울 수 있다.
  그는 시에 있어 성실하고 겸손해 할 줄 아는 올바른 자세를 지닌 시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갈고 닦는 부지런하고 지칠 줄 모르는 열기의 시인이다.

   겨우내 달아오르던
   거대한 수목들의 뿌리며
   몇 알 球根의 견고한 意志
   단단한 밤의 안개를 털며
   아픈 파도로 솟았다
            ---<年代記>의일부

   다시 돌아올 모든
   젖은 발들을 위하여
   푸른 목소리를 위하여
   宿根草는 겨우내내
   아리게 아리게 앓았다.
           ---<바람의 짓>의 일부

  그는 결코 그의 시를 위해 무력할 수 없다는 결의가 있다. 그것은 곧 
절망이고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아름다운 한 줄의 시를 위해 고난을
극복해야 할 운명을 자각하고 있다. 그의 자각은 바로 그의 시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부동산이자 믿음직스런 보호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섣불리 그의 주장을 시에 노출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있다. 作詩에 있어서 모든 것은 시를 거역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의
내면에 깔려 있는 것 같다.
  그가 관심하고 있는 것들은 너무도 다양하다. 전통에 대한 향수, 관능, 지방
특색을 살리는 시, 리듬 문제, 참여시, 등은 조금쯤 그를 고심케 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따위는 그의 시에 대한 집념과 그의 의지로서 잘 통어되고 다듬어
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그가 솟아나는 정열을 알맞게 다듬어 억누르면서 아름다운 시를 계속 
빚을 수 있는 훌륭한 시인이 될 것을 확신하며 우정의 테두리 안에서 이 사족을
덧붙여주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도 낯 붉혀 민망하게 생각한다.

   샐비아 활활 타는 길가 주막에
   소주병이 빨갛게 타고 있다
   불길 담담한 저녁 노을을
   유리컵에 담고 있는 주모는
   루비 영롱한 스칼릿 세이지 빛
   반짝이는 혀를 수없이 뱉고 있다.
              ---<다시 가을에 서서>의 일부

  어느 가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더욱 빛나는 洪兄의 대성이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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