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시> 가을의 도시에 서서

洪 海 里 2005. 11. 9. 12:47
가을의 도시에 서서
홍해리(洪海里)
 

시멘트 바닥 철조망 아스팔트 위
하얀 씨앗들의 급보의 소나기
항복이다. 항복! 하는 비명을 치며
도시는 하릴없이 젖고 있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 거리
현기증과 이명의 골목에서
영원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사색은 날개를 접고 죽어버렸는가
허깨비의 춤은 밤낮없이 계속되고
황금빛 뱀의 혓바닥이
단색의 꽃을 피우고 있다
허무한 꽃이파리들의 웃음소리
배부른 저 여자의 두툼한 손으로
권태와 허영의 바람을 날리며
휘청대는 저 사내의 가랭이 아래
인생은 오락인가 감각의 거품인가
무엇으로 우리를 잴 수 있으랴
바람이 불면 휩쓸리고
물이 지면 이냥 묻히는
동양의 심장 서울의 핵
항상 낯선 그림자가 시간의 얼굴에 그림자를 던진다
비밀문자와 암호에 익숙한
너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너는
닫혀진 가슴의 창문 밖으로
불빛은 희미하니 시들어가고
우리의 잠 속 깊이
깊이 없는 무지개의 뿌리를 잡는
등등하던 여름의 청동빛 팔뚝으로
지혜의 눈썹을 하늘에 걸어봐도
진땀으로 얼룩진 불면의 꿈들이
청명한 귀뚜라미 울음을 내몰고 있다
단잠 속에 빛나는 하얀 눈부심을
서늘토록 아름다운 새벽을 위하여
우리들의 젖은 뿌리를 위하여
땡볕 아래 막소주로 땀을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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