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시> 바다 그림 앞에서

洪 海 里 2005. 11. 9. 12:40
바다 그림 앞에서
홍해리(洪海里)
 

머리 허연 노인이
묵화를 치고 있었다
배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출렁이고
주름투성이인

얼굴
그리고 온몸
노인은 옷을 하나하나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서서
바다를 치고 있었다
바다도 옷을 하나씩 벗어던지고 ……
속을 보여주지 않았다
눈을 감고 바라보면
대낮에도 삼경의 칠흑을 안고
가슴을 풀어내여
묵묵히 묵묵히 묵화를 치는
노인의 손길마다
파도의 입술이 떨고 있었다
경련하는 사지에 피어나는 물보라
바다는 보이지 않고
묵화 한 폭이 걸려 있었다
감은 눈의 망막 가득히
꽃이 피어 있었다.

 

 

'시집『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여름 기행  (0) 2005.11.09
<시> 가을의 도시에 서서  (0) 2005.11.09
<시> 꿈속 아이들  (0) 2005.11.09
<시> 섣달에 잠깨어  (0) 2005.11.09
<시> 별곡  (0) 2005.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