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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가을에 만난 <우이동 시인들>

洪 海 里 2005. 11. 23. 10:05

 

 

 

저문 가을에 만난 <牛耳洞 시인들>

 

 

상 희 구(시인)

 

시인을 찾아서/우이동행

          저문 가을에 만난 <牛耳洞 시인들>

                                               상 희 구(시인)

   소매가 턱없이 긴 도포자락처럼 몸체보다 잎사귀가 더 큰 실히
 천 년은 됨직한 우람한 오동나무 한 그루가 온통 산을 덮고 있다.

   시간은 제가 지닌 것보다 훨씬 저물어서 사위는 벌써 어둑어둑
하다

   높푸른 산록은 태고 이래 주야로 마르지 않는 산골짝 물이 흘러
   이끼는 너무 짙고 숲은 오히려 시커멓다

   숲 사이로 여늬 사람들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는 쬐끄만 極樂鳥
 몇 마리가 마침내 코끼리 만큼은 커져서 매일 일정한 시간에 내려
와선 모이를 얻어먹고 간다.


 우리가 저문 가을 느즈막한 해거름에 <牛耳洞 詩人들>의 사랑방
인 詩壽軒(詩瘦軒이 아닌 이유가 있다)을 찾았을 때는 이런 분위
기였다.
 빌딩 옥상의 뒤 발코니를 임시 시멘트 바라크로 개조한 너무나 
허름한 곳이었지만 차가운 시멘트벽 곳곳에 그윽한 茶香이 배어
있고 詩墨이 깃들어서인지 조금도 거칠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草廬의 운치가 더했다.문화니 문명이니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있
고 너무 조촐해서 차라리 寓居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마침 동행한 형대시학 정진규 주간께서 <우이동 시인들>의 동인
인 네 분을 소개해 주었다. 나로서는 지면으로야 한참 구면들이었
지만 실제 응대하기로는 생판 초면들이다. 시의 뼈대가 곧고 시종
온화한 모습을 잃지 않는 영락없는 詩선비 李生珍 시인, 정갈한
예복(홍 시인은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다.)차림으로 뺨이 琥珀
도곤 붉은 洪海里 시인, 눈꺼풀이 두꺼워서 눈을 뜬 건지 감았는지 
모호한 흡사 운주사 臥彿 같은 林步 시인, 천길 절벽 앞에 우뚝 버티
어 선 거룩한 斷崖 같은 모습의 채희문 시인 등의 면면을 뵈었다.
같은 우이동에 거주하는 구순희, 최춘희 시인과 김현파 시인이 배
립해 섰다. 원래 우이산자락은 산자수명해서 예로부터 시인 묵객
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당대의 저명한 시인 文士들도 허다하
다. 원로 김종길, 황금찬 시인을 비롯한 정진규, 이생진, 김동호,
박희진, 최하림, 임보, 홍해리, 채희문, 김신용, 이문재, 조윤희, 
박서원, 이무원, 정성수, 오수일, 황도제, 구순희, 김현파, 최춘희, 
시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따끈한 녹차 한 잔으로 수인사를 나누고 <우이동 시낭송회>가 끝
나면 으례 뒤풀이 마당으로 모인다는 근처 소주방으로 자리를 옮겼
다. 소주잔이 몇 순배 돌자 이내 격렬한 시론으로 불꽃이 인다.

 처음 내가 알기로는 <牛耳洞 詩人들>이란 것이 우이동 일원에
거주하는 시인들로 주로 <우이동 시낭송회>에 참여하는 분들이 주
축을 이루는 것으로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우이동 시인들>이란 
동인지 「牛耳洞」을 펴내고 있는 이생진, 임보, 채희문, 홍해리 
네 분 시인이 결성한 동인의 명칭이란 것을 그 자리에 가서야 알
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번 「시인을 찾아서」라는 테마의 주인
공은 이상 네 분 시인을 중심으로 언급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간밤에 내려왔다 돌아가지 못한 별이다
     갯쑥부쟁이는 절벽을 좋아한다
     쑥부쟁이는 바람을 좋아한다
     쑥부쟁이는 파도소리를 좋아한다
     쑥부쟁이는 늘 혼자다
     빙긋이 웃으려다 울어버리는 오후의 고독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면
     저승에서 온 사람처럼 손을 내민다
     갯쑥부쟁이는 가까이 있으면서
     먼 데 있는 너 같다

       -이생진, 「성산포, 긴털갯쑥부쟁이」 전문

 이생진 시인의 근작이다. 완전히 자연과의 합일이다. 천상의 별은
지상에 내려와 한 송이 갯쑥부쟁이꽃으로 피었고 쑥부쟁이는 어느날
하늘로 올라가 천상의 별 하나로 반짝인다.
 절벽과 바람과 파도소리를 좋아하는 것은 갯쑥부쟁이가 아니라
갯쑥부쟁이 속에 들어앉은 시인 이생진이다.
 <갯쑥부쟁이는 늘 혼자다/빙긋이 웃으려다 울어버리는 오후의 고
독>이란 대목은 이 작품이 계속 긴장을 유지하게 하면서도 또한
가벼운 터치의 현대적 감각이 한층 돋보이는 부분이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면/저승에서 온 사람처럼 손을 내민다/
갯쑥부쟁이 가까이 있으면서/먼 데 있는 너 같다/쑥부쟁이는 늘
혼자다>에서는 우리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결코 범상하지가 않
다. 우주의 생성원리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독자들로 하여금 섬
뜩하기까지 했던 소월의 산유화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시인에
게는 이승과 저승이 그렇게 멀지가 않다. 악수의 거리만큼 가깝
다. 평소 시인의 작품에서 梅月堂이나 黃梅泉에서처럼 孤高의 기
품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읠까. 평생에 시 삼천 수를 남기
겠다고 하셨으니(지금까지 일천오백여 편을 쓰셨다고 한다) 일생
동안 일만이천여 편을 썼다는 저 유명한 고려 때의 전설적인 大詩
人 白雲居士 李奎報를 맞잡아 가시기를 바랄 뿐이다.

 임보 시인은 필자가 최근에 주목하는 시인이다. 2년여 전 『현대
시학』의 신작소시집 후기인 「시인의 詩話」란 글에 「새로운 신
화를 꿈꾸며」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앞으로 우리 시단에서 전혀
미개척 분야인 神仙思想을 테마로 작품을 쓰겠다는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그동안 우리 시단이 未堂이나 김춘수, 박두진 같은 어른들
에서 젊은 시인들로 옮겨오면서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팽창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혼돈 속에서 방황하던 중 보다 토착적인 것에로의 
시인의 발상이 신선함과 새로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시인의
작품은 구성이 탄탄하고 詩風이 유유자적한데다 또 선이 굵고 호방
해서 거침이 없다.

     이 미망의 방황이 끝나는 날
     우리들의 고향도 아마 거기 있으리라.
     그러나 이름(名)이여,
     난마처럼 일어서는 地上의 꽃들이여,
     어느 불길로 너희를 태워
     가는 길을 밝게 하리

      -임보, 「꽃」 전문

 임보 시인의 작품에서 크게 주류를 이루는 두 가지 흐름은 신선
사상과 無爲이다. 이 세상에서 이름을 세운다는 것은 명예일 수도
있고 출세일 수도 있다. 그러한 영광은 곧 꽃이다. 그러나 한편으
론 구역질 나는 오욕 덩어리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한낱 부질없
는 짓이다.
 술자리의 열기가 달아오르면서 한참 시이야기가 무르익던 중에
필자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임보 시인의 한 마디가 있었다. 앞
으로는 작품을 한 단계 地上으로 끌어내려야 하겠다는 것이다. 어
느새 자기 자신을 꿰뚫어본 것이다. 그동안 시인의 작품은 너무 高
踏的이고 幽玄한데다 계속 상승국면만을 치달아 온 게 사실이었다.
詩作을 계속하면서 스스로를 가늠하고, 천상에서 지상으로, 지상에
서 천상으로 자유자재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섭다. 앞으로 지상으로
끌어내려진 천상의 보물(작품 또는 이미지)들을 기대해 본다.

     H 시인의 가슴은
     찢어진 우산이다

     쐬주보다 씁쓰레한 비가
     허구헌날 줄줄 샌다
     이젠 고칠 수가 없다

     그래도 그는

     그게 자기에게 잘 어울린다고
     마지막 재산처럼
     소중하게 지니고 다닌다

       -채희문, 「우울한 日誌 18」 전문

 채희문 시인의 「우울한 日誌 18」 전문이다. 시인의 작품은 주로
기독신앙에 기초한 신앙고백시와 일상을 주제로 한 소박한 허무주
의가 주조를 이룬다. 문학 하는 한 가난한 도회지 소시민의 情調를
가식없이 읊은 것인데 처절하기까지 하다. 시인의 가슴은 우산처럼
찢어져 있고, 찢어진 가슴을 훑어내는 쓴 소주맛, 그래도 시인은
그게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마지막 재산처럼 소중하게 지니고
다니리라.

 볼은 연신 발그레한 홍조를 띠고서 성균관의 무슨 행사날 제관을
맡은 有司처럼 정갈한 차림의 洪海里 시인은 시종 입가에 조용하
고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행동거지들도 너무 조용해서
대화한다는 것이 마치 속삭이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시인의 모든
것들은 너무 따습다. 그러나 洪海里 시인의 작품들을 대하고 보면
이런 따스한 것들과는 너무 판이해서 한 마디로 너무 차갑고 날카
롭다. 蘭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말을 듣고 보니 동짓달 설한풍에
예리한 비수처럼 내민 蘭의 촉수 같다고나 할까.

     다 버린 마음 하나 시리게 서서

     팽팽한 빛줄 하나 당기고 서서

     마른 영혼 애오라지 펼치고 서서

     은빛하늘 날아가는 철새를 보네.

       -洪海里, 「시린 하늘 찬바람」 전문

 우리들의 심성이 너무 디룩디룩 비대해지고 둔중해 있다면 쇠칼
하나 날이 보이지 않게 벼리고 벼려서 얇디 얇게 저며 내어 맵찬
바람에 내걸어두고 싶은 필자의 심성이 눈에 선연하다.

     그대의 투명한 성에 피어 있는
     성에 같은
     하늘꽃자리.

      -홍해리, 「그리움」 전문

 시는 되도록 짧고 간결해야 맛이 난다. 詩를 말씀(言)의 절(寺)로
표기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을 두고 한 말이리라. 하느님이 만든 송곳
으로 뚫은 구멍은 너무 조밀하고 섬세해서 구멍난 자리가 안 보이는
게 아닐까. 작품이 이 경지에 이르면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

 도시가 너무 팽창해지고 번다해져서 나중에 사람이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생겨난 제도로 그린벨트라는
것이 있다. 개발을 제한하고 형질변경을 금지해서 그래도 숨통이
트일 곳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요즘처럼 시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시인이 지천으로 불어나는 마당에 시의 공해문제가 대두되고 있
다. 아무리 惡書라도 안 읽는 것보다야 읽는 편이 낫다고 하지만
지은이의 이름마져 감쪽같이 숨겨지고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도 못할 시집이 버젓이 대형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
르내리고 있는 판국이다. 상업주의와 야합한 일부 얼치기 시인들
이 시단을 마구 오염시키고 그 폐해는 너무 중증이어서 시단의 심
장부까지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혼탁한 시단에 그래도 한 걸음쯤 비켜서서 牛耳洞이라는 한
수려한 자연공간을 바탕으로 시의 순수성을 붙잡고 한 테마를 가
지고 몇십 년에 걸쳐 천착해가는 <牛耳洞 詩人들>에게 박수를 보
내고 싶다. 이 나라 시단의 한 자락, 이빨 틈새처럼 미세하게 자리
한 <우이동 시인들>. 이와 같은 詩의 그린벨트가 여기저기서 생겨
났으면 한다.

*상희구: 1942년 대구 출생. 1987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발해기행』 외 다수 있음.

                                      (현대시학.1995.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