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錫珉 기자 칼럼

<책갈피> '황무지' 인생

洪 海 里 2005. 12. 16. 11:00

<책갈피 속의 오늘>

1888년 美시인 T S 엘리엇 출생
[동아일보 2005.09.26 03:06:22]

  버지니아 울프는 그에 대해 ‘포피스 정장을 입고 있는 것처럼 까다롭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그에겐 좋아하는 가수에게 팬레터를 보내는 일면이 공존했다.
  그의 집 벽난로 위엔 예이츠와 발레리 같은 대시인의 사진뿐 아니라 담배를 물고 있는 코미디언의 사진도 놓여 있었다.
1910년대 그와 교류하던 한 인사는 “슬그머니 다가가 붙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저만큼 앞에 서 있다”고 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는 T S 엘리엇.
  그는 이름보다 대표작 ‘황무지’(1922년)로 더 친숙하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황무지’의 한 구절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5부 433행의 장시(長詩) ‘황무지’는 시인의 실체만큼이나 난해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시대적 환멸과 허무에 관한 시로 읽히는가 하면 생태주의를 노래했다거나 심지어 불교시라는 주장도 있다.
엘리엇 자신은 “단지 개인적이고 전적으로 무의미한 인생에 대해 불평하고 그것에 리듬을 붙여본 작품일 뿐”이라고 했다.
  시인은 1888년 9월 26일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안은 부유했으나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와 과보호가 이뤄졌다. 대학 시절엔 보스턴의 지루하고 삭막한 분위기에, 잠시 머문 파리에선 대도시의 소외감에 갑갑해 했다.
  옥스퍼드대 유학 시절 미모의 무용수 비비언 헤이우드와 결혼했지만 그녀의 정신질환이 짐이 됐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낮에는 직업인 은행일로 시달리고, 밤에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의 신경질을 견뎌야 했으니 결코 평범한 일상은 아니었다.
그의 위대한 시편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엘리엇은 “훌륭한 시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逃避)여야 한다”는 몰개성시론을 주창했다.
하지만 동시에 “시인이 자신의 사적인 경험들-자신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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