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
1912년 시인 노천명 출생
그가 남긴 몇 장의 빛바랜 흑백사진이 그러하듯이,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인은 여렸다. 고적(孤寂)했다.
“내 마음 속엔 언제나 비명(悲鳴)이 살고 있었네….”(실비아 플라스)
그러나 그는 비명을 토해내지 않고 삼켰다. 안으로 삭혔다.
고독과 애수(哀愁)는 그의 운명이었고 그의 시(詩)가 되었다.
노천명은 1930년대 모더니스트 시대에 한국여성시의 출발을 알리는 이정표였다. 일제 강점기 여성시단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현대시사에 비친 그의 모습은 초라하기만 하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은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을 새겼으니
‘친일(親日)’과 ‘부역(附逆)’의 멍에 속에 함몰된다.
그는 “숱한 기막힌 역사를 삼켰고/위대한 역사를 복중(腹中)에 뱄다!”(‘새해맞이’)
5월이면 찔레향이 유난히도 싸했던 황해 장연에서 시인은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심하게 홍역을 앓고 죽었다 살아나 ‘천명(天命)’이란 이름을 얻는다.
산개나리를 한 아름 꺾어 안고 산마루에 올라 수평선에 아물거리는 감빛 돛폭에 넋을 빼앗기던 소녀는 꿈이 많았다.
이화여전을 졸업하던 해인 1934년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기자로 입사한다. 이듬해 창간된 ‘시원(詩苑)’에 ‘내 청춘(靑春)의 배는’이라는
작품으로 등단했고 그 3년 뒤에 처녀시집 ‘산호림(珊瑚林)’을 냈다.
신극운동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여 극예술연구회에서 무대에 올린 안톤 체호프의 ‘앵화원’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때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던 김광진을 만났으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에겐 처자가 있었다.
일제 말기 친일문학의 오점을 남겼던 노천명. 그는 전쟁 중에는 문학가동맹에 가담했다 서울이 수복되자 ‘반동 문학인’으로 찍힌다. 20년형을
선고받아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붉은 군대의 총부리를 받아/대한민국의 총부리를 받아/새빨가니 뒤집어쓰고/감옥에까지 들어왔다!”
이때 쓰인 옥중시(獄中詩)는 현실에 대한 혐오감으로 사무친다. 그 단아한 센티멘털리즘은 자기도피로 치달았고 청순한 시어(詩語)는
시들어갔다.
악성빈혈에 시달리던 그는 1957년 자택에서 부조리한 생(生)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아직 마흔 다섯. 독신(獨身)이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시인(詩人) 노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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