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봄, 벼락치다』2006

추억, 지다

洪 海 里 2006. 4. 30. 05:41

추억, 지다

洪 海 里

 


한여름 다 해질녘
봉숭아 꽃물을 들인다
꽃을 따 누이의 손톱마다
고운 물을 들인다
이쁜 반달손톱 속에는 벌써
첫눈이 내린다
매미 소리 한철 같은 누이의
첫사랑이 내린다
추억이 짓는 아스라한 한숨소리
손톱 속으로 스며들고
손가락 꼭꼭 싸맨 그리움이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
해 설핏한 저녁에 꽃물을 들이는
눈썹마당에 이는 바람인 듯
슬슬슬 어스름이 내릴 때
가슴속에선 누가 북을 치고 있는지
다소곳 여민 적삼 안으로
그리움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입술 촉촉 젖어 살짝 깨무는 소리
어스레한 누이의 젖은 눈가로
봉숭아꽃 하나 둘 지고 있었다.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꽃물이 손톱 끝에 닿으면 그리움은 더 짙어진다. 저녁놀 넘어갈 때 한 번 더 붉게 물드는 것처럼
산을 넘는 첫사랑이 진하고 진하다. 꽃물 들이고 첫눈 올 때까지 그리움을 보내는 동안 붉은 입술과
하얀 피부와 맑은 눈동자는 그렇게 지면서도 선명하다.

   이제 나는 사랑이 스며든다는 말을 알겠다. 사랑이 물들었다는 말을 쓸 때 내 몸은 이미 젖어서
고운 색깔을 내는 것을 알겠다. 이 추억이 몸에서 빠져나가려면 내게 들어온 간절한 시간만큼
돌아보며 머뭇거릴 것이다. 아직 첫눈은 오지 않았다.
   - 금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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