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 13

처음처럼

처음처럼 홍해리'처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겨운가요'첫'자만 들어도 설레지 않는지요첫 만남도 그렇고첫 키스는 또 어때요사랑도 첫사랑이지요첫날밤, 첫새벽, 첫정, 첫잔나는 너에게 첫 남자너는 나에게 첫 여자이고 싶지요"처음 뵙겠습니다잘 부탁합니다!"자리에 앉아 처음으로 따르는 한잔의 술첫 키스의 아련한 감촉처럼이나첫날밤의 추억처럼 그렇게잔을 들어 입술에 대는 첫잔첫정이 트이던 시절의 상큼함 만큼이나나도 처음처럼너도 처음처럼언제나 처음처럼이라면물로 시작해 불로 끝나는홀로 왔다 홀로 가는 긴 여로처음처럼 그렇게 살다 갈 수 있다면.

허수아비

허수아비 홍 해 리 나이 들면 그리움도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나이 들면 무서운 것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막상 나이 들고 보니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텅 빈 들녘에 홀로 서서 낡은 옷자락만 바람에 흐느낍니다 그래도 마음은 가득하니 짜장 부자입니다. - 시집 『정곡론』(2020, 도서출판 움) * 허수아비의 노래 그냥 그렇게 없이 살아도 정이 있었고 떡 한 조각도 서로 나누고 사는 재미가 있었다는 지난 시절이지만 풍요 속에 가난은 신의 균형일까. 이 넉넉한 물질 세상에 오히려 더 재미없다는 사람들의 윤택한 절규이다. 그리움과 무서움은 마음이 연한 감성의 자리라서 나이 들수록 고목처럼 마르고 거칠어지지만 나이 들어도 그리웁고 무섬타는 여린 마음도 있음이라. 그러나 텅 빈 들녘에 홀로 선 허수아비처럼 낡..

역설 또는 미완의 완성

역설 또는 미완의 완성 洪 海 里 1. 살날이 줄어들수록 하루는 그만큼 길어지네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은데 세상 사는 일 길고 짧은 일 그게 무엇인가 퍼져나갔던 꿈도 나이 들어 줄어들다, 끝내는 나 하나뿐 나 자신으로 끝나고 마네 2. 명작이라고? 걸작이라고? 세상에 걸작이 어디 있고, 명작이 어디 있는가? 그걸 만든 사람이 완성하지 못하고 손들고 버린 것일 뿐이지 만족해서 손 놓은 완성작일까 세상에 걸작은 없다 그것을 쓴 사람이나 그린 이가 살아 있다면 어찌 명작이고 걸작일 수 있겠는가 이미 쓰인 글, 그려진 작품에 붓을 대지 않는 이 시인인가? 화가인가? 하루가 너무 지루하게 긴데 살날은 얼마 남지 않았네. - 계간 『문학춘추』 2024. 여름호(제1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