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커니 잣거니』(미간) 358

역설 또는 미완의 완성

역설 또는 미완의 완성 洪 海 里 1. 살날이 줄어들수록 하루는 그만큼 길어지네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은데 세상 사는 일 길고 짧은 일 그게 무엇인가 퍼져나갔던 꿈도 나이 들어 줄어들다, 끝내는 나 하나뿐 나 자신으로 끝나고 마네 2. 명작이라고? 걸작이라고? 세상에 걸작이 어디 있고, 명작이 어디 있는가? 그걸 만든 사람이 완성하지 못하고 손들고 버린 것일 뿐이지 만족해서 손 놓은 완성작일까 세상에 걸작은 없다 그것을 쓴 사람이나 그린 이가 살아 있다면 어찌 명작이고 걸작일 수 있겠는가 이미 쓰인 글, 그려진 작품에 붓을 대지 않는 이 시인인가? 화가인가? 하루가 너무 지루하게 긴데 살날은 얼마 남지 않았네. - 계간 『문학춘추』 2024. 여름호(제127호).

백모란

백모란 洪 海 里 첫날밤 치른 초록 궁전, 외동공주의 백옥 침상. * 해마다 5월이 되어 뒷산 꾀꼬리 노랫소리에 송홧가루가 노랗게 날리면 운수재韻壽齋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백모란이 피었다고. 막걸리 한 통을 메고 운수재로 달려가면 백옥 같은 모란이 동산을 이루어 피어 있다. 꽃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있으면 솜씨 좋은 마님이 안주를 준비해 나오신다. * 운수재는 임보 시인댁.

귀가 지쳤다

귀가 지쳤다 洪 海 里 들을 소리 안 들을 소리까지 대책없이 줄창 듣기만 했다 늘 문이 열려 있어 온갖 잡소리가 다 들어오니 그럴 만도 하지 대문을 걸어 잠글 수 없으니 칭찬 아첨 욕지거리 비난 보이스피싱까지 수시로 괴롭히니 귀가 지쳤다 하루 한시도 쉴 새 없이 한평생 열어 놓고 줄곧 당한 귀의 노동 이제 귀가 운다. - 월간 《우리詩》 2024.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