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詩評> 실물과 독백 사이 / 김석준 // 장醬을 읽다 / 洪海里

洪 海 里 2007. 9. 23. 20:52

실물과 독백 사이


|김석준(시인·문학 평론가)


  시는 원래 파롤이다. 말의 직접성, 의사소통 그리고 대화적 관계를 통한 내적 울혈의 해소. 시의 말들은 말들을 위한 말의 잔치가 아니라, 말의 현전화를 통해서 이 세계를 길항 소통시키는 데 있다. 청량한 의미의 집적체, 발화된 순간 깨어 움직이는 의미들. 파롤은 이 세계를 질주 관통하면서 세계의 운행을 정위시킨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시의 말은 파롤의 저 현전적 가치를 사상시켜버리고 씌어지는 랑그로 자신의 모습을 변양시킨다. 의미의 저장고인 문자. 이제 문자는 기표와 기의 관계를 전도시켜 의미표현이나 의미지시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말놀이, 기표에 의한 기표의 대체, 의미의 차연 내지 죽음, 그리고 소통불능 상태.

 현대성 위에 씌어진 시적 언어는 불모의 지대 내에서 기술되는 죽은 문자이다. 현대성의 비극은 파롤이 랑그로로 전환함에서 비롯한다. 단언적으로 말하건대 분명 그렇다. 말의 제의적 가치를 망각한 시대, 말의 의미와 직접성을 상실한 시대, 현대의 시적 언어는 말의 순수한 의미와 말의 순결한 축제를 소통 불가능한 사태로 변질시켜 그로테스크한 환상으로 묘파하고 있다. 이미지 위에 판타지, 판타지 옆에 엽기, 엽기 아래 유희. 현대의 시적 언어는 실물과 독백이라는 언어의 절대 지표를 망각한 채 무한질주 중이다.

해체론적 의식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시의 반성적 가치는 파롤의 복원에 있다. 시의 위의는 소통의 심급 위에 펼쳐지는 저 지고한 의식의 현현인데, 현대성은 감각화 된 의식과 물화된 사유를 강화시켜 세계 의미 전체를 문자화 된 화려한 기호 속으로 잠행시킨다. 부유하는 기호, 현란한 대중적 아이콘, 소비욕을 부추기는 상품, 본질의 저편으로 무한 질주하는 욕망하는 세계. 시의 말은 말 자체의 반성력이 아니라, 말의 반성을 통한 세계 전체의 반성이다.

 이때 시적 언어는 망각된 파롤의 소통력을 문자 속으로 되불러와 사물의 본질과 내적 본질을 응시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시는 파롤적 소통을 통해서 물화된 대상세계를 살아 숨쉬는 대상으로 만드는 동시에 저 지고한 상상적 지평으로 비약해 들어가 존재의 원상을 응시하게 만든다.

 따라서 시는 대화다. 시는 대화하면서 저 영혼의 처연한 울음소리와 환희를 받아 써내려가는 운명의 소리이다. 그것이 비록 비극의 소리일지라도, 그 비극의 내밀한 파동과 울림을 옴쳐내어 세계를 감동하게 하는 바로 그 지점이 시가 씌어지는 지점이 아니겠는가. 하여 시적 언어의 발화점은 실물과 독백이 상호 변증법적 관계를 이룩하면서 또는 물질과 정신, 이 양자가 서로를 화육시키면서 이 세계 전체를 시적 언어로 예인하게 되는 무한한 운동의 지점이다. 따라서 시의 운동점은 세계점 속에 내파되어 있다. 

 

 

장醬을 읽다

 

그녀는 온몸이 자궁이다

정월에 잉태한 자식 소금물 양수에 품고

장독대 한가운데 자릴 잡으면

늘 그 자리 그대로일 뿐……,

볕 좋은 한낮 해를 만나 사랑을 익히고

삶의 갈피마다 반짝이는 기쁨을 위해

청솔 홍옥의 금빛 관을 두른 채

정성 다해 몸 관리를 하면

인내의 고통으로 기쁨은 눈처럼 빛나고

순결한 어둠 속에서 누리는 임부의 권리


몸속에 불을 질러 잡념을 몰아내고

맵고도 단맛을 진하게 내도록

참숯과 고추, 대추를 넣고 참깨도 띄워

자연의 흐름을 오래오래 독파하느니

새물새물 달려드는 오월이 삼삼한 맛이나

유월이 년의 뱃구레 같은 달달한 맛으로

이미 저만치 사라진 슬픔과

가까이 자리 잡은 고독을 양념하여

오글보글 끓여 내면

투박한 기명器皿에 담아도

제 맛을 제대로 아는

오, 장醬이여, 너를 읽는다

네 몸을 읽는다  

- 홍해리, 「장醬을 읽다」, 『우리시』 9월호


  시의 실물을 정확하게 언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부터 시의 실물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의 실물은 시인의 진정성과 맞닿아 있는데, 언어와 의식이 상호 혼융되어 절대의 지점으로 이입하게 될 때, 또는 언어가 외적 대상을 순결한 상태로 고양시킬 때, 우리는 시의 실물과 조우하게 된다. 따라서 시(또는 시의 실물)란 예민한 감각능력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결합할 때, 시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외적 대상의 가능성을 몽상 속에서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사실 시가 씌어지는 지점은 감각이 언어로 치환되는 황홀의 순간인데, 바로 그때 오감으로 세계를 느꼈던 감각은 마비되고 문자들이 살아 움직여 말들의 향연을 벌인다. 감각이 문자로 읽힌다. 대상이 살아 움직여 미지의 기호들을 세상에 흩뿌린다. 시적 언어가 발화되는 순간은 외적 대상들과의 의식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홍해리 시인의 「장醬을 읽다」는 섬세한 손길로 시가 씌어지는 지점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읽는다는 것은 대상을 살아 숨쉬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그 대상을 사랑과 연민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것인데, 시인은 물질적 상상력을 통해서 물질에 정령을 불어넣는다.

  물적 대상을 공손하게 모시는 시인. 시의 상상력은 물적 타자를 대화적 관계 속으로 수렴시켜 사물의 밀도와 온기를 읽어 언어로 치환시킨다. ‘읽음’은 사물 속에 내재한 의미를 읽는 것인데, 그것은 오감의 눈으로 보는 행위가 선행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봄seeing은 모든 의식이 집중된 전일全一한 상태인데, 홍해리 시인은 그 보는 행위를 통해 자연의 순리를 정관해낸다.

  사실 장을 읽는 행위는 장이 익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행위인데, 시인은 그 과정을 하나의 제의적 모습으로 승화시켜 우리네 먹거리인 장을 인간학적 모습으로 변환시킨다. 앨런 와츠가 『물질과 생명』에서 모든 살아있는 생명적 사태를 에너지의 전환 형태로 이해했던 것처럼, 더 나아가 생명과 생명의 흔적들을 하나의 제의적 의미로 고양시켰던 것처럼, 홍해리 시인도 장을 읽는 행위 속에 자연의 순리적 흐름을 내파시킨다.

  이때 인간은 인내와 고통과 슬픔을 체험하다가 문득 고독의 심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저 오묘한 생의 진리를 깨우치게 된다. 우리네 식탁을 풍요롭게 하는 장醬. 장醬은 장場으로 변하여 축제의 장을 풍요롭게 펼친다. 하여 읽는 행위는 향유하는 행위로 질적 비약하는 동시에, 우리네 삶 깊숙이 스며들어 생을 지속시키는 뼈와 살이 된다.

  이처럼 흥겹고 살맛나는 장의 제의가 어디 있는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읽음의 의미론적 행위인가. 홍해리 시인의 「장醬을 읽다」에 형상화된 의미론적 읽음은 세계-내-내 존재물들을 살뜰하게 모시는 살가운 시선이다. 하여 그의 시선은 물활론적 세계에 맞닿아 있다. 살아 움직이는 물질적 제의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장의 저 화려한 변신. 생의 고뇌와 흥겨운 축제.

- 월간『우리시』2007.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