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노적가리 지붕 어스름밤 가다가 기러기 제 발자국에 놀라 노적가리 시렁에 숨어버렸다 그림자만 기우뚱 하늘로 날아 그때부터 들판에 갈림길이 생겼다.’(박용래 ‘들판’ 중에서)
‘책 읽는 대한민국’의 2007년 일곱 번째 시리즈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이 22일 막을 내렸다. 이번 시리즈는 가을에 잘 어울리는 책으로 ‘시집’이 꼽히면서도, 요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지 않는 현실을 염두에 뒀다. 특히 학자와 출판인 등에게 책을 추천받던 다른 시리즈와 달리, 시인과 소설가가 시집을 골라서 소개하는 형식을 택했다.
작가의 내밀한 추억을 듣는 즐거움도 있었다. 서울살이를 시작했을 때 숱하게 전전한 변두리 빈방에서 시인 박형준 씨는 저녁마다 박용래 시인의 ‘먼 바다’를 펼쳐 읽었다. 너무나 시인이 되고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상 앞에 앉아 밤을 새웠지만 조경란 씨는 결국 소설가가 되었다.
시인이었다 소설가로 전업한 작가들의 글도 흥미로웠다. 대학 1학년 때 신대철 시인의 ‘무인도를 위하여’를 몇 번씩 읽었다는 소설가 성석제 씨의 글에서 몇 년 뒤 시인으로 문단에 처음 이름을 알리는 젊은이가 그때 얼마나 들떴을지가 그려진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집 ‘끝과 시작’에 대한 소설가 김연수 씨의 담백하면서도 시적인 리뷰를 보면 시인으로 시작한 그의 문학 이력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심보르스카의 시집도 그렇지만, 소설가 신경숙 씨가 권하는 프랑시스 잠의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 장석남 시인이 소개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불과 얼음’ 등 해외 시인들의 작품이, 국경을 넘어선 시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일깨웠다. 소설가 백가흠 씨가 소개한 김경주 시인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강정 시인이 권하는 이준규 시인의 ‘흑백’ 등 젊은 신인들의 작품에 대한 꼼꼼한 감상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성과였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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