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밥을 먹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삶이 힘겹다는 것은 밥 벌어 먹고사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배고파 죽는 일도 흔했다. 오죽했으면 시인 김영석은 ‘밥을 보면 무덤이 생각난다’고 했을까. ‘소학교 마을 뒷산의 한 무덤 앞에는/무덤 모양 동그랗게 고봉으로 담은/흰밥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지난해 흉년에 굶어죽은 이의/무덤이었다.’(‘밥과 무덤’)
▷밥은 ‘인륜의 기초이며 사유(思惟)의 토대’(소설가 김훈)이니 밥 앞에서 까불면 안 된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좋아져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 수 있고 첨단 정보와 컴퓨터가 시대를 끌어간다 해도 누군가는 비바람치고 불볕 쬐는 논밭을 기며 하루 세 끼 밥을 길러 식탁에 올려야 한다’(박노해). 세상에는 밥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것들도 있겠지만 밥 없이 그것보다 더 큰 것들을 이룰 수는 없다.
▷대통령 선거에서 ‘못 살겠다 갈아 보자’는 외침이 나온 게 1956년이다. 1인당 국민소득 400달러였을 때다. 50여 년이 흘러 2만 달러가 되었는데 다시 ‘못 살겠다 갈아 보자’는 민심이 야당 후보를 압도적 표 차로 당선시켰다. 진보니 분배니 자주니 평등이니 하는 선(善)한 말이 민중의 밥줄을 끊은 악(惡)이 된 데 대한 엄중한 심판이었다. 결국 ‘밥’(경제)이다. ‘밥이 곧 하늘(민심)’이요 시대정신이었다. 예수는 “밥이 더러운 게 아니라 말이 더럽다”고 했다. 말이 아닌 밥을 위한 정치가 열릴 건가.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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