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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불꽃에 취해버린 시인 블레이크의 삶

洪 海 里 2007. 11. 24. 06:43

 

혁명의 불꽃에 취해버린 블레이크의 삶… 시대…
 


◇시인과 서커스/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이진 옮김/436쪽·1만2000원·비채
 
18세기 런던 템즈 강 웨스트민스터 다리 근처의 스미스필드. 이곳의 푸줏간과 도살장에서 소년 젬은 처음으로 죽음이란 무엇인지 깊이있게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헤맨다 법이 임자 정해버린 거리들을/그 근처로는 법이 임자 정해버린 템스 강이 흐르고/만나는 얼굴 얼굴마다에서 나는 본다/나약함의 표지, 슬픔의 자국을.’

(윌리엄 블레이크, ‘런던’ 중에서)

 

군주제를 반대하는 공화주의자들의 움직임이 거세던 18세기 영국. 때마침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일렁이는 혁명의 불꽃에 런던은 뒤숭숭했다.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사진)의 시 ‘런던’은 혼란스러운 도시의 풍경을 대단히 예리하게, 대단히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

블레이크에 매료된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45)는 이 뛰어난 시인의 삶과 시대를 복원하기로 한다. 일찍이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화가 얀 베르메르와 17세기 네덜란드를 되살려낸 슈발리에로선, 장기를 발휘할 수 있는 소재였다.

1729년 3월 런던. 목수인 토머스 캘러웨이 가족이 런던 램버스로 이사 온다. 아버지가 서커스단의 무대 소품을 만들게 되면서다. 목수의 아들 젬은, 되바라졌지만 활기차고 영리한 소녀 매기 버터필드와 가까워지고, 두 사람은 이웃집 남자 블레이크와 왕래하게 된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빨간 모자를 쓰고 다니고 정원에서 부인과 알몸으로 ‘실낙원’을 읽는 괴상한 사내다. 블레이크는 소년 소녀에게 자신이 쓴 시를 읽어 주고 직접 그린 그림을 보여 주며, 때로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젬의 누나 메이지는 순진한 시골 소녀이지만 서커스단장의 아들인 바람둥이 존과 사랑에 빠지면서 예정된 상처의 길로 들어선다. 군주제 지지자들이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인 블레이크의 집을 습격하면서 소년 소녀들의 운명은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예술가와 그 시대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는 것은 슈발리에의 장기이지만, 이 소설은 오래된 초상화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슈발리에는 소설 속 소년 소녀들이 시대의 혼란과 더불어 성장하는 과정을 세심하게 보여 준다. 젬과 매기는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하면서, 메이지는 실연의 아픔을 겪으면서 전과 같을 수 없는 10대의 시간을 보낸다. 블레이크가 목가적 동심의 세계를 그린 시집 ‘순수의 노래’를 낸 뒤 투쟁하는 현실세계가 담긴 ‘경험의 노래’로 옮아갔던 것처럼, 소년 소녀들은 ‘순수’에서 ‘경험’으로 향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한 편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역시 이 소설의 매력은 뛰어난 묘사다. 연애와 범죄가 함께 벌어지는 골목, 유쾌한 허풍이 난무하는 술집, 우아하게 차려 입은 귀부인이 있는 템스 강 건너편 소호 거리, 창녀와 부랑자들로 가득한 세인트 자일스 빈민촌, 여기에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서민들에게 환상적인 오락거리가 된 화려한 서커스 장면들….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듯한 풍경을 읽다 보면 “슈발리에는 생생하고 사실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데 천부적”(타임스)이라는 평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원제 ‘Burning Bright’(2007년)는 블레이크의 시 ‘호랑이’의 한 구절. 블레이크의 아름다운 시편도 소설 곳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