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스크랩] 물의 뼈

洪 海 里 2008. 12. 1. 12:58

 

 

 

 

물의 뼈 / 홍해리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자리가 다 차면 주저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출처 : 수 필 닷 컴
글쓴이 : 高恩 원글보기
메모 :

제245회 우이시낭송회에서.(2008. 11. 29. 도봉도서관)

 

 <「물의 뼈」와 까치집>


 진리란 어떤 것인가? 진리란 객관적 사물 및 그 법칙에 대한 정확한 반영이며 오류란 객관적 사물 및 그 법칙에 대한 왜곡적인 반영이다. 다 같은 반영이지만 하나는 정확한 반영이고 하나는 왜곡적인 반영이다. 양자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서 그것들을 동일시하거나 혼동시하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 만약 이 경계선을 혼동하고 특정적인 조건하에서 얻은 인식을 “진리이기도 하고 오류이기도 하며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고 하면 상대주의, 궤변론, 회의론에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와 오류간의 경계선은 절대적이 아니므로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진리가 오류로 전화되고 오류가 진리로 전화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란 모두 구체적인 것으로서 일정한 조건하에서의 객관적 사물 및 그 법칙의 정확한 반영임은 주지의 사실인 바,이 조건이 변화되면 객관적 사물 및 그 법칙도 변화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인간의 인식도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원래의 진리만을 진리라고 고집하고 인식한다면 그 진리적 인식 자체가 바로 오류가 됨을 모르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홍해리 시인의「물의 뼈」를 살펴보자.


 물의 뼈


 

물이 절벽을 뛰어 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 자리가 다 차면 주저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이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전문)


  홍 시인이 쓴 이 시는 논리적으론 엉망진창이다. 진리와 오류를 대립되게 배치해놓고 다시 갈라놓을 수 없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으니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다. 그러나 진리와 오류를 절묘하게 상존시킨 재주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 한데도 불구하고 논리성을 확보하였으니.

그래서 ‘안도 다다오’를 불러내고 싶어진다. 그의 머릿속에 오랜 세월 각인되어 있는 ‘뼈’라는 말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안도 다다오! 일본 사람이다. 1941년 오사카의 서민 동네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어려운 집안 형편과 저조한 학과 성적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한 상태인 그는 동네 체육관에 놀러 갔다가 ‘공부를 안 하고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관장의 꼬임에 빠져 권투에 입문하고 말았다. ‘싸우면서 돈을 벌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멋진 일거양득이다.’ 그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거리에서 거들먹거리는 깡패들을 피하지도 않고 당당히 맞서 단 한방의 주먹으로 초주검을 만들 수 있다니 절로 신바람이 났다. 일전쌍조(一箭雙鳥)의 실마리를 찾은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그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한없이 기뻤다.
그는 피나게 샌드백을 두드리며 프로 권투선수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밥만 먹으면 도장에서 권투만 한다는 사실이 온 몸을 지겹게 감기 시작했다. 전적은 23전 13승 3패 7무. 전도가 난망한 프로 복서도 아니지만 앞날이 기대되는 화려한 권투선수도 아니었다. 그래서 불투명과 낙관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좌고우면하다가 진로를 바꾸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런 권투선수로 살아간다면 허울좋은 하눌타리가 아니라 밥 빌어 먹다가 죽을 쑤어 먹을 놈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이 적성에 잘 맞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기나 하나?’ 등등 몇 날 며칠 고심하던 그는 중학교 때 이웃 목수가 자신의 집을 개축할 때 중얼거리던 말을 떠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되새기기 시작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뼈가 있는 법이지. 집도 뼈가 있어야 해. 그래야지만 오랜 풍상을 견딜 수 있어. 살기도 편하고 영육의 안거도 실팍해지지.” 그리고 이어서 “집을 지을 때는 까치집처럼 지어야 돼. 까치는 뼈를 넣어 집을 짓거든.” 바로 이 말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갔다.
‘뼈와 까치집’은 평생의 화두가 되었고 ‘까치가 뼈를 넣어 집을 짓는다?’는 의미는 천착의 대상이 되었다.
62년인 21살 때 그는 권투로 번 약간의 돈을 가지고 세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눈물나는 독학이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이 찾아오면 링 위에서 상대방의 주먹에 맞아 쓰러지는 상황을 떠올리며. 혹독한 시련을 참고 견뎠다. 우리나라[일본]는 학력사회다. 나처럼 학력이 없는 사람은 연전연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패가 두려워 싸움을 그만 둘 수는 없다. 계속 싸우다 보면 열에 한번쯤은 이길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였다.
까치 부부들이 장성한 새끼들을 분가시킬 경우 직접 살림집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때 들이는 공정의 노력은 말로 표현키 어렵다. 나뭇가지를 물어와 올려놓곤 앉아 본다. 불편한 곳이 없는지 확인을 한 다음 만약 있다면 교체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시 위치를 바꾸거나 그럴 형편이 못 되면 서로 나무 끝을 물고 잡아 당기거나 밀거나 구부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집은 새로운 자식 내외의 신혼자리가 된다. 새 보금자리는 높은 곳에 있기에 뱀이 나무를 타고 오르지 못한다. 비가 사흘 내려도 절대 고이는 법이 없다. 바람이 극렬해도 날아가는 일이 없다. 그 어떤 악천후에도 견고 건재하다. 이 장경을 본 그는 그제서야 까치집에 담긴 뼈의 의미를 해독한 것이다.  뼈가 ‘정신 또는 혼’이라는 사실까지
그는 쉬지 않고 건축가로서의 욕망을 키워나가며 ’뼈‘를 접목시키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곤 10평짜리 좁은 땅에 집을 지으며 뜻을 펼치기 시작할 때부터 뼈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비록 좁은 땅, 작은 건물일망정. 대성의 꿈과 뼈를 담아야 한다는 꿈은 서로 견인차 노릇을 하며 결곡한 자세를 불러 일으켰고 드디어  69년 오사카에 건축사무소를 열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의뢰인도 없는 설계 프르젝트를 꾸준히 내놓으면서 실의를 감내하며 뼈를 심기 위한 꿈을  다듬고 키웠다.
대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세계의 명문대들은 그를 앞다퉈 초청했다. 87년에 예일대, 88년엔 컬럼비아대, 90년에 하바드 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냈다. 97년부터는 도쿄대 건축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세계의 거장이 되었다.

 그는 “무엇이 좋은 건축인가?”라는 질문에, 이탈리아 로마의 판테온에서 느낀 감정을 예로 들면서 “처음에는 ‘재미난 모양이다’ 두 번째는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자 했나 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 번째는 “거기서 울려 나오는 찬송가 합창을 듣고 가슴이 저며왔다.”라고 말했다. “건축은 그렇게 사람의 심금을 울려야 한다”는 게 그의 결론인데 다시 말하면 판테온에 뼈가 있음으로 인해 심금을 울린다는 사실을 세 번 가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홍해리 시인의 물의 뼈는 어떠한가. 진리를 오류라고 하고 있는 것인가. 오류를 진리라고 고집부리고 있는가? 진리와 오류를 변증법으로 통일한 ‘물의 뼈’는 물리학의 뒤라는 형이상학의 정점에 도달해 있는 종교로 자리매김되어 있는 것이다. 직감, 예감, 육감의 결합인 직관에 의해 사물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에 다다랐으니 물에 뼈가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판테온을 건립할 때 뼈를 담기 위하여 노심초사했을  장인의 눈에서 모든 철리가 부드러움에 기인하며 아울러 감동 감화는 온유와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철학을 물의 뼈라는 단어로 증명하고 있으니.
보이는 뼈만이 뼈고 보이지 않는 뼈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고집한다면 그런 자와는 같이 밥도 먹지 말고 술도 마시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바로 그런 사실을 한편의 시에 담아 인식 이후에 실천이 있음을, 실천을 해야 보람이 있음을, 넌지시 활자화 하여 애인 자랑하듯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 물의 뼈에 대한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따지며 재론한다면 그것은 홍 시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와 오류를 뛰어넘어 절대적 진리를 시에 담아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라고 역설하는 의미를 우리 또한 모르는 바 아니나 다시 한번 세상에 던지는 우문현답 같은 필로소피에 푼푼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며 또한 상대적이라는 사실까지 독자들에게 물처럼 젖어 알게 했으니. 소소명명(昭昭明明)이다.

                                                                                                     - 황도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