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서평> '부재하는 것'을 보는 세 가지 방식 -시집『비타민 詩』/ 임수만

洪 海 里 2009. 3. 16. 19:17

 

<서평>

 

'부재하는 것'을 보는 세 가지 방식

- 洪海里 시선집『비타민 詩』

 

                                                                                    임 수 만(한국교원대 국문과 교수)

 

0. 머리말

 

 누구나 다 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때로는 "우리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뼈저리게 인식할 수 있다. 이떄 시간의 질은 빛이 변하듯 바뀐다."⑴

 고은, 유안진, 홍해리 세 시인의 최근 시집을 함께 보면서 필자는 E. 사이드가 말한 '말년성(lateness)'이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이드는 그 개념을 아도르노로부터 빌려와 "위대한 예술가들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삶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그들의 작품과 사상이 새로운 이디엄, 이른바 말년의 양식을 얻는지 논의"하고 있다.⑵  아도르노에 따르면, "말년의 예술 작품에 드러나는 주관의 힘은 작품 자체를 떠나서도 남는 성마른 몸짓"이며, 그 작품들은 "존재의 본질에 마주한 자아의 유한한 무력함의 증인"이다.⑶  흔히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고은은 '허공'을 통해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유안진의 이번 시집에 나타난 불안과 파국의 느낌은 무엇 때문인가? 홍해리는 왜 그토록 '자연'과 '시'에서 '비타민'을 찾는데 집착하는가? 하는 물음을 과연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그들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힘'은 과연 깊이 파헤쳐져 설명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0. 뒤집어 보기

 

 홍해리 시인의 말에 따르면, 시선집『비타민 詩』는 그의 세 권의 시집 『봄, 벼락치다』(2006),』푸른 느낌표!』(2006),『황금감옥』(2008)에서 '비타민 C'만을 뽑아 만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 시집의 서두에 실린 작품들을 보면서 독자들은 평범치 않은 기운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첫 두 작품을 보자.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ㅡ「봄,벼락치다」부분

 

     산들성이 지는 해, 네 앞에선

 

     어찌 절망도 이리 환한지

     ㅡ「참꽃여자 15」부분

 

 ①의 작품은 우선, '봄'을 '천길 낭떠러지'로 비유하고 있다. 약간 의외의 결합이다. 연을 달리하여 생각할 여지를 두었기에 독자들이 일단 이를 수용하고 상상력을 전개시켜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거침이 없다.

즉, '낭떠러지'라는 보조관념을 투영해 보면 산자락마다 피어난 연분홍 꽃들은 '파르티잔'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산을 타고 오르는 '불'이기도 하다. '역병이 창궐하듯 / 여북했으면 저리들'이겠는가. 그 봄이 밀어올린 극점에 '천길 낭떠러지'가 있었던 것이고, 거기에서 '벼락'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것은 꽃들이 피어나는 소리의 합창이겠지만, 그에 감응하여 일어난 "내가 날 부르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들은 그 봄 풍경 앞에서 또한 자기 자신과 맞딱뜨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②의 작품에서도 그 구도는 풍경과 내면의 조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비록 '절망'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라 하더라도 시인은 그것을 '환한' 것으로 甘受한다. 아니 그렇게 표현해 내고 있다. 어둠 속에서 길어올린 빛, 절망의 역전과 승화. 그래서 '비타민 詩'라 했던 것일까?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에서 느껴지는 힘, 그 앞에선 "어찌 절망도 이리 환한" 것일까.

 하지만 이번 시선집에서 필자를 가장 힘나게 했던 것은 '비타민'보다는 '밥'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해주시던 기억 속의 '밥'에서 나아가 지상의 '밥' 한 그릇의 의미를 생각케 하는 다음과 같은 작품은 어쩌면 속깊이 숨겨진 홍해리 시인의 根氣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했다.

 

 

     밥은 금방 떠서 윤기 잘잘 흐를 때

     푹푹 떠서 후후 불며 먹어야

     밥맛 입맛 제대로 나는 법이지

     전기밥솥으로 손쉽게 지어

     며칠을 두고 먹는 지겨운 밥

     색깔까지 변하고 맛도 떨어진

     그건 밥이 아니다 밥이 아니야

     네 귀 달린 무쇠솥에 햅쌀 씻어 안치고

     오긋한 아구리에 소댕을 덮어

     아궁이에 불 지펴 나무 때어 짓는

     아아, 어머니의 손맛이여,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검은 솥뚜껑

     불길 고르다 닳아빠진 부지깽이

     후둑후둑 타는 청솔가리

     설설 기는 볏짚이나 탁탁 튀는 보릿짚

     참깻단, 콩깍지, 수숫대

     풍구 바람으로 때던 왕겨 냄새 그리운 날

     냉장고 뒤져 반찬 꺼내기도 귀찮아

     밥 한 공기 달랑 퍼 놓고

     김치로 때우는 점심 홀로 서글퍼

     석 달 열흘 가도 배고프지 않을

     눈앞에 자르르 어른거리는 이밥 한 그릇

     모락모락 오르는 저녁 짓는 연기처럼

     아아, 그리운 어머니의 손맛!

     그러나 세상은 그게 전부가 아닐세

     시장이 반찬이라 하지 않던가

     새들은 나무 열매 몇 알이면 그만이고

     백수의 제왕도 배가 차면 욕심내지 않네

     썩은 것도 가리지 않는 청소부

     껄떡대는 하이에나도 당당하다

     배고픈 자에겐 찬밥도 꿀맛이요

     밥 한술 김치 한 쪽이면 임금님 밥상

     그러니 지상은 늘 우리의 만찬장이 아닌가.

     ㅡ「밥」전문

 

 이 작품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무쇠솥에 햅쌀 씻어 안치고" 청솔가리나 볏짚, 참깻단, 콩깍지 등으로 불 지펴 지어낸 "금방 지어 윤기 잘잘" 흐르는, 어머니가 지어주시던 '밥', "그리운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나" 이후의 시행은 이와 같은 유년의 몽상으로부터 돌연 현실 세상으로 (거의 폭력적으로) 전환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시인의 말처럼 "배고픈 자에겐" "밥 한술 김치 한쪽이면 임금님 밥상" 부러울 것 없는 것이 세상일인 것이니, 그렇게 본다면 이 삭막한 세상이 바로 "시장이 반찬"이요 "우리의 만찬장"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홍해리 시인에 의해 이 세상은 비타민 아닌 것이 없고, 시 아닌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손맛, 그것이 이제는 찾기 힘든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지금, 시인은 이를 악물고 찬밥 한술에 김치 한 쪽을 얹어 입에 넣고 있다. 그게 "임금님 밥상"이고 "우리의 만찬장"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어조에는 현실의 각박함이 투영되어 있다.

 정태적 자연의 풍경을 뒤흔드는 역동적 상상력, 회고적 그리움에 머물지 않고 지상으로 그 생명력을 끌고 들어오는 역전의 상상력, 그로 인해 비로소 시인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는 고단한 지상의 삶을 좀 더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죽음과 같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읽어내고, 삭막하게 사물화되어가는 현실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배수진을 치고 뒤집어 올라오는 소박하지만 강한 힘, 그것이 홍해리 시인의 이번 시선집이 선사한 가장 큰 영양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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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마티, 2008, 10쪽.

⑵ 위의 책, 28쪽. 

 

(계간『시와정신』2009. 봄호, 제27호)

 

* 위의 서평 가운데 고은 시인과 유안진 시인에 대한 서평은 제외했음을 밝힙니다.

                                                                                    - 洪海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