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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약동하는 봄은 '詩' /「봄, 벼락치다」: 최경애

洪 海 里 2009. 4. 20. 11:25

<최경애의 山居有感>

 

 

약동하는 봄은 '시詩'

                                       

 

봄, 벼락치다 / 洪 海 里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
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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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가지끝 마디마디에서 잎눈이 터지는 중’

 

 위 시는 서울 북한산 기슭 우이동에 사는 홍해리 시인이 매일 세이천에서 귀를 씻으며 쓴「봄, 벼락치다」라는 제목의 시이다.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봄에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약동하는 생명의 신비로움, 눈부시게 피어나는 꽃, 그리하여 가슴에 새로이 샘솟는 희망, 나른함, 따위의 것들인데, 벼락친다니! 얼마나 섬뜩한 제목인가.

 이 시를 읽자마자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선시인가? 하는 의구심이다. 왜냐하면 선종계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을 읽으면 느껴지는 선적 아우라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천길 낭떠러지다,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과 같은 언어는 선종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이정표로 흔히 쓰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또 그 선적 아우라는 봄을 형용하는 단어와 문장들이 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활용된 데서도 알 수가 있다. 일명 ‘벼락경’이라고도 하는 〈금강경〉도 공(空)을 인식하기 위하여 수많은 실체를 제시하고 있지만 제시된 실체는 그 실체와는 전혀 상관없는 공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화가가 화선지에 달을 그리기 위하여 달 이외의 공간에 먹물을 입히는 것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몹시 답답했다. 이미 봄이 와 있음을, 온 산야에 꽃이 만발하여 붉게 물들었고, 겨우내 봄을 꿈꾸던 숲속은 아련한 아지랑이 피워 올리며 어여쁜 연초록 세상으로 생명의 춤사위를 펼치고, 온 천지는 봄, 너도 봄 나도 봄이라고, 수많은 사실과 진실을 중생들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은 매화다, 아니 복수초다’, ‘철쭉이 진달래보다 예쁘다,’ ‘봄이 짧아져 금방 여름이 올 거다,’ 라는 둥 엉뚱한 알음알이를 내고 다투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인 내가 바람으로 걸림 없이 자유롭게 소요하듯이 북한산 자락에 한 성품이 있어 희노애락을 살활검으로 삼아 자유자재 넘나들며 앉아 있으니, 보이느냐? 천지는 여전히 고요했다. 이윽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 수단을 꺼내셨다. 보아라! 이 한 송이 꽃을!

 바야흐로 봄이다. 벼락을 맞고 이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꽃몽우리와 잎눈이 터져야만 비로소 새로운 세계, 봄이 출현한다. 꽃몽우리가 터지듯 심안을 뜨지 못하면, 헛된 관념의 세계인 고해에 움츠리고 있으면, 찬란한 봄, 깨달음의 세계는 없다. 변화의 현상이 활발한 이 봄에 스스로의 관념에 벼락을 때려 이 낭떠러지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 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만난 새벽별만이 벼락이 아니라, 육근에 작용하는 무수한 인연들이 다 명명백백한 벼락이라고 외치고 있다. 지금 오대산록은 나뭇가지끝 마디마디에 잎눈이 터지는 중이다. 아! 찬란한 봄이여,

소소명명昭昭明明! 
                                      (주간불교. 1025호, 2009.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