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시> 자벌레

洪 海 里 2009. 9. 16. 19:15

'詩가 있는 풍경'(서울일보) 2009. 9.16. 수요일자 

 

 

 

 

                                     

                                                  자벌레

                     洪 海 里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다시 쌓았다

 무너뜨린다.

 

그것이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한 평생의 길,

 

 

은 몸속에 있는

무등無等의 산이다.

 

 

                                       

 

 

   시 읽기

 자벌레는 자벌레나방의 애벌레이다. 중간 쌍의 다리가 없어 가늘고 긴 원통형 몸으로 앞부분을 쭉 뻗은 후 꽁무니를 머리 쪽으로 당겨 올리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움직인다.

제 몸의 길이를 다하는 걸음 걸음이 마치 자로 길이를 재는 듯한 모습이기도 하고,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쌓았다 무너뜨리는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삶은 움직임이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어떤 절명의 한순간도 건너 뛸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자로 재면 잴수록 질곡의 수렁 속에 빠지는 것임을 알면서도, 한평생을 자로 재어가며  잘 살고 잘 살아야 하지 않는가.

 

 걸음걸음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쌓았다 무너뜨리는 저 조그만 자벌레도

그 이상은 더할 수 없을 정도의 지극한 삶, 그 무등無等의 산을 넘고 있는 것이다.

  유 진/ 시인, 첼리스트<선린대학 출강>

 

 

<감상>

자벌레를 본다.

저 자그마한 몸뚱어리로

푸른 산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고

벌판을 만든다.

몸 자체가 길이고 강이고 시간이다.

구부리면 산이 되고

쫙 펴면 길게 뻗쳐 지평선이 된다.

작은 몸속에 도사린

우주를 발견한 시인의 눈,

끊임없이 쌓았다 무너뜨리는

자신의 시의 산을

'자벌레'로 은유했으리라.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는

저 꾸물꾸물한 움직임은

그 얼마나 순정하고 맑고 눈물겨운가?

無等의 산속 오솔길은

또 얼마나 그윽하고 향기로운 것인가?

그 어딘가 숨어있는 옹달샘은

또 얼마나 새콤달콤할 것인가?

아무도 몰래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일에 몰두하여 푸른 잎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쬐끄만 자벌레들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으리라.

구불텅구불텅한 갈지자로

혹은 상쾌하고 신나는 둥근 산의 모습으로

가벼운 날갯짓으로

비상할 날 꿈꾸면서...

 

- 나병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