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시집『花史記』(1975) 에서
겨울 삽화 / 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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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석유 파동 이후 연탄이 빨갛게 타는 난로 주변 주택복권 얘기가 꽃피고 조간신문 7면 잉크에 젖어 있는 매몰 광부의 구겨진 유서.
Ⅱ 사람들은 다 어디 가 숨고 보드라운 혓바닥만 살아 뱀도 되고 은어도 된다 헐벗은 가슴의 사내들이 값싼 유행가를 부르는 이 깊은 밤 갑갑한 시대 밖에서 젖고 있는 궂은 빗소리.
Ⅲ 불만과 적개심을 데리고 할딱이는 기대의 화살을 뽑아내고 죽은 입에서 귀를 주어내고 썩은 살 속에서 눈알을 추려내고 너무 높이 있어 닿지 않는 너의 손을 적시고 있는 몇 방울의 피 뜨거운 피. |
소금 속에서 빛이 / 홍해리
한 알의 소금 속에서 수 천의 빛이 터져 나오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비로소 빛이던 소금 한 알이 밝은 속에서도 빛이다. 그늘 아래서 소금처럼 앓던 빛의 언어여.
Ⅰ 소금이여 소금이여 심장을 밝혀다오 가장 붉고 건강한 심장을 밝혀다오 밤낮 지지리 앓던 나의 심장을 밝혀다오, 너의 심장을 밝혀다오, 오오, 밝혀다오. 내가 너에게 닿을 때까지 밝혀다오, 모든 것이 자명해지도록.
Ⅱ 보인다 네 등에 박힌 살이 들린다 네 목에 젖은 울음이 자꾸 우리를 울리는 것은 무한대공에서 부는 천의 바람도 만의 얼굴을 짓는 바다도 아니다 하나 너의 칼날 무구한 우리의 아침을 부수는 것은.
Ⅲ 몰아 넣어다오, 모든 어둠을 어둠이란 어둠은 모두 몰아서 소금알 속에 묻어다오, 창자 속의 젖은 손과 뼈까지도 모두 묻어다오. 다시 빛이 터져 나오도록 모든 어둠을 묻어다오.
Ⅳ 말을 잊는 우리의 언어여 수 천년 입다문 빛의 언어여, 소금이여 살 속에서 저무는 천년을 산 채로 깊이 빠진 역사를 밝음 속에서도 빛이게 묻어다오 모든 것을, 살아 있는 나의 잠을 묻어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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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的 / 홍해리
돌과 돌 사이를 빠져나온 바람이
나의 겨냥을 훼방놓고 있다.
미궁 속에서 방아쇨 당기는 너의 손
희죽희죽 환상을 기르고 있다.
우리들은 생선처럼 퍼덕이고 있었거니
그러다 한 가닥 햇살에 끌려
바람처럼 내닫고 있다
드디어 관통
전신을 드러내고 울고 있다.
자신이 더욱 분명한 잠 속의 우리
모래알 속을 걸어가는 우린 흔들리고 있다.
지구는 자꾸 뒤채이면서
스러지는 수목들의 모가질 껴안고 있다.
날마다 우리들은
새로운 햇빛과 바람을 맞으면서
싸움에 지레 지치는 일상이지만
산란기 여자들은 표범을 뜯고 있다.
골목 밖 햇살을 투망질하고 있는
사내들의 손마다
코빠진 그물이 들려져 있다
바람이 쏜살같이 빠져나가고 있다.
벌판 / 홍해리
울음이 진하면 눈물이 벌판에 가득하다 서리가 하얗게 일어서는 풀잎 위에 눈이 내린다.
천년을 내려 쌓여도 이리의 울음소린 가리우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우성만 바람에 쫓겨 다닌다.
외롭다 외롭다 우짖으며 모두 돌아간 자리에 저만큼 어둠이 다가서면 고흔 빛깔이 진해 되려 어두워 까물어치는 하늘이다.
우리가 곤한 밤에 벌판에 나와 보면 잠들지 못해 뒤채이는 별이야 초롱초롱 살아나지만 벌판은 혼자서 엉엉 울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는 벌판에서 서서 혼자일 수밖에야 어쩌는 수가 없다.
꿈이야 한밤이면 어이 오쟎랴만 외롭다 지워버리는 한 목숨이면 차라리 엉엉 우는 벌판에 서서 나도 같이 목 놓아 울어나 보면.
눈을 쓸다 / 홍해리
새벽에 일어나 눈을 쓸면 하늘이 쓸린다.
눈이 내린 아침 온갖 물상은 민주주의 지상엔 굴복한 모든 사물이 일어서고 순은으로 타는 햇살.
지난 여름 타던 천둥과 번개도 어린 시절의 환상과 동경도 얼어 내렸다. 구름도 내려와 쌓였다 바람도 날아와 쌓였다.
밤사이 하산한 산새들의 하얀 노랫소리 담밑에 얼어들고 바람소리도 솔잎에 쉬어 대숲에 묻어 있던 밤도 하얗게 새었다. 하느님의 사타구니에서 쏟아져 내리는 무수한 넋의 나래치는 소리 놀미봉 꾸꾸기도 눈이 멀었겟다.
빗자루 잡은 손에 스미는 서늘함이여 죽은 열기의 평화 위에 가만히 들리는 소리 쓸지 말아라 쓸지 말아라.
소리 1 / 홍해리
백목련이 피었다 언제 지는지 살 떨어지는 소리로 가슴을 때리고 있다.
지지 않을 듯 지지 않을 듯 이마에 서늘히 하얀 불 켜고 순한 살로 의연히 미소짓더니,
다 타고 나서 재조차 남기지 않을 듯 천지간을 화안히 밝히더니만,
아무 나무 새순이나 꽃잎쯤이야 감히 치어다 보지도 못하게 하늘 아주 가까이 봄을 불러 올려서 은밀하니 데이트나 하자 하더니,
화무십일홍! 화무십일홍! 하릴없이 지고 있다.
그렇게 피었다 그렇게 지는 이 아픈 개화가 뚜욱! 뚝! 가슴을 울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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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짓 / 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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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치 혀끝에 부는 바람 바다도 잠 재우고 벌판도 압도하여 수미산의 구름도 걷우운다. 밝은 가을밭에 끝없이 돌아오는 영원한 기연이여. 이승의 아름다운 노래란 노래는 모두 담아서 날려라 풍선처럼 푸른 벌판에 다시 돌아올 모든 젖은 발들을 위하여 푸른 목소리를 위하여 숙근초는 겨우내내 아리게 아리게 앓았다. 입술 사이 떨고 있던 사랑 수 천 유순의 눈썹 그림자만 흔들어 놓고 갔다.
詩를 쓰는 이유 / 홍해리
십리 밖 여자가 자꾸 알찐대고 있다. 달 지나는지 하루살이처럼 앓고 있다. 돌과 바람 새 능구렝이가 울고 있다. 내 안을 기웃대는 눈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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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그 찬란한 허무 / 홍해리
죽음을 앓던 고통도 허무도 뜨거운 태양 앞에선 한 치의 안개일 뿐. 또 하나의 허탈과 어둠을 예비하고 폭군처럼 몰고 가는 자연의 행진. 가을의 풍요론 황금 하늘을 위해 영혼의 불은 끝없이 타오르고 폭염으로 타는 집념의 숲 무성한 잎들의 요란한 군무소리, 모든 생애를 압도하는 천국의 바람 일상의 타협과 미련을 거부하고 폭풍으로 파도로 새벽의 꿈을 걸르던 경험의 손가락 무거운 열매를 접목하고 있었다.
새벽의 꿈 / 홍해리
모든 것을 이승의 잠 속에 접어두고 가벼이 날아가다 보면 시월 상달 산수유 열매를 적신 새벽 이슬도 빠알갛게 물이 들었다.
잠 속의 어둠을 털고 일어서면 이승의 모든 계약도 그대로 열나흘 달빛을 얼르던 강물소리도 그대로,
잠 속에 열려진 대문을 나섰더니 날새도 발소리 죽인 허허론 모랫벌을 잠깨어 눈을 부비듯 짧은 추억의 그림자로 문대고 있는 파돗소리, 바닷물은 찰랑히 서서 조잘대고 갈밭은 흔들리며 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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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史記 / 홍해리
하나
처음 내 가슴의 꽃밭은 열 여덟 살 시골처녀 그 환한 무명의 빛 살 비비는 비둘기 떼 미지의 아득한 꿈 흔들리는 순수의 密香 뿌연 새벽의 불빛 즐거운 아침의 연가 혼자서 피아프게 뒤채이던 늪 아침까지 출렁이며 울부짖는 꽃의 바람, 드디어의 開門.
둘
꽃밭의 꽃은 항상 은밀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나의 눈썹은 현악기 가벼운 현의 떨림으로 겨우내 기갈의 암흑 속에서 눈물만큼이나 가벼이 지녀온 나약한 웃음을, 잔잔한 강물소리를, 그리고 있었다 조용한 새벽을 기다리는 꽃씨도 꽃나무도 겨울을 벗고 있었다 눈은 그곳에도 내리고 강물 위에도 흔들리며 쌓이고 있었다.
셋
내가 마지막 머물렀던 꽃밭엔 안개가 천지 가득한 시간이었다 돌연한 바람에 걷히는 안개 내해의 반짝이는 시간의 둘레에서 찢어지는 울음을 울고 있었다 기인 겨울의 인내 속에서 빚은 푸른 비늘이 깜빡이는 잠 밤새워 울던 두견이 깨고 있었다 어느 꿈결에서든가 맨살로 불타는 목청이 깊이깊이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생명은 안개 속에서 온 세상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넷
꽃밭에는 오히려 향그런 불길, 불이 타오르고 있다 오랜 세월의 흐름은 순수한 어둠 속에서 해를 닦아 꿈 속의 원시림을 밝히고 있다 어둠 속에서 밝게 피는 한 잎 두 잎의 웃음 웃음의 이파리가 날리는 숲 밤을 먹은 작은 새들이 금빛 햇발을 몇 개씩 물고 있다 황홀한 아침이면 고운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
다섯
수를 놓는 아내의 잠은 항상 외롭다 수틀 속 물오른 꽃대궁마다 태양이 껴안겨 있다 손마다 가득 괴는 가슴의 설움 병처럼 깊어 더욱 외롭다 고물고물 숨쉬는 고요 사색의 이마는 꽃보다 고운 여름의 꿈이 맺혀 있다 꽃은 죽어 여름을 태우고 꿈보다 예쁜 불을 지피고 있다.
여섯
여름바람은 느릿느릿 걸어서 온다 한밤 창가에 흐르는 바람소리 눈을 가리우고 자그만 하늘과 땅을 열고 있다 가을이 오는 꽃밭 겨울 준비를 하는 사철나무 속으로 속으로 잠을 깁는다 성숙한 날개를 자랑하는 잠 천둥도 번개도 멎은 한여름밤의 해일도 잠든 하늘에는 은밀한 속삭임뿐.
일곱
겨울 열매로 가득찬 나의 눈 마을마다 아낙들이 치마를 펴 모든 신비와 향수를 맞고 있다 신들은 하늘에서 내려와 땅 속에서 꿈을 빚는다 빨간 꽃도 되고 하얀 꽃, 밀감나무도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미완의 회화 나의 눈은 언제나 허전하다 죽음과도 친한 나의 잠 나의 꽃밭은 텅 비어 있다.
| * 최병무 시인의 블로그 '詩의 향기'(http://blog.daum.net/dongsan50)에서 옮김.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