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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설중매와 인동초 / 허엽

洪 海 里 2010. 1. 2. 16:27

<칼럼>

 

설중매와 인동초

 

허 엽(동아일보 문화부장) heo@donga.com

 

오래전 필자가 대학입시 본고사를 치를 때 국어 시험에         

‘춘향()과 월매()’가 1000자 작문의 과제로 나왔다.

필자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은 춘향전을 떠올려

춘향의 절개, 딸에 기대어 팔자를 고치려는 월매, 춘향을 어떻게 해보려는 변 사또에 대한 생각을 썼다.

하지만 한 친구는 한자의 뜻 그대로 춘향을 봄의 향기로,

월매를 달빛에 비친 매화로 풀어내 전혀 다른 글을 썼다.

그 상상력이 내심 놀라워 어떤 글일까 궁금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더 묻지 못했다.

작문 배점이 20점에 불과했지만 이 일은 이후 글쓰기에서

고정관념과 상상력의 차이를 되새기게 하는 일화로 뇌리에 새겨져 있다.

경제 위기로 마음도 춥고 몸도 추운 요즘,

그 친구의 상상처럼 한자 이름의 뜻풀이가 새삼 다가오는 꽃이 있다.

설중매()와 인동초()다.

설중매는 눈 속에 핀 매화, 인동초는 겨울을 이겨내는 풀이라는 뜻이니….

할미꽃, 꿩의다리, 개망초꽃, 쑥부쟁이, 엉겅퀴 등 수많은 우리 꽃 중에서

그처럼 ‘사람의 뜻’이 새겨진 이름의 꽃을 찾아보기 어렵다.

국화()인 무궁화() 등 몇 가지에 불과하다.

1926년경 한국의 야생화들을 스케치해 ‘먼 한국에서 채집한 야생화와 민요’라는 책으로 낸

미국의 플로렌스 크렌 씨도 인동초(덩굴)를 이름의 뜻보다 약재로서의 효능 위주로 소개하고 있다.

외국인인 그가 ‘인동’을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설중매는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다.

꽃을 시샘하는 눈발을 견디며 홀로 피는 꽃이어서 선비의 절개에 비유된다.

우리 야생화 사진을 찍어 해외에 알려온 사진작가 김정명 씨는

“(전남 광양시) 매화마을에서 눈보라를 무릅쓰고 분홍 매화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며

“선비들이 매화를 분재로 많이 키웠고, 그러면 1월에도 꽃을 볼 수 있으니 바깥에 눈이 오면 그것이 곧 설중매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인동초의 꽃은 5, 6월경에 피지만 여린 이파리는 한겨울 삭풍에도 푸른빛을 유지한다.

얼음 속에서 선명한 녹색을 띤 인동잎을 김 작가의 사진을 통해 봤는데 참으로 처연했다.

이 꽃은 하얗게 피었다가 꽃가루받이 이후 노랗게 변하기 때문에 금은화라고도 불린다.

예부터 좋은 일을 가져오는 길상화로 여긴지라 백제 고구려 고분 벽화나 유물에 인동무늬가 새겨져 있다.

갖은 풍상을 묵묵히 견뎌내고 제 길을 가는 미덕을 설중매와 인동초에 비유한 시도 많다.

 

‘창밖, 소리 없이 눈 쌓일 때/…젖 먹던 힘까지, 뽀얗게/ 칼날 같은 긴, 겨울밤/ 묵언으로 피우는/ 한 점 수묵…’(홍해리의 '설중매')

 

 ‘눈 속에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김춘수의 '인동잎')

설중매와 인동초라는 이름을 누가 언제부터 썼는지 분명하진 않다.

하지만 한낱 꽃에 이 같은 무게를 준 우리에게는 원래 인고()의 유전자(DNA)가 있는 것 같다.

우리 역사의 수많은 전란, 가깝게는 10년 전 환란을 극복한 것도 그 DNA 덕분이 아닐지….

 

지구 범위에서 춤추는 주가와 환율,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파생상품의 파산에 이은 불황의 해일 앞에서 우리 개인은 너무 무기력하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화도 나건만, 따질 데도 없으니 꿋꿋이 견딜 수밖에 없다.

추운 날, 설중매나 인동초가 다시 보이는 이유다.

 

 

 

 

설중매雪中梅

 

洪 海 里


 

창밖, 소리 없이 눈 쌓일 때

방안, 매화,

소문 없이 눈 트네

몇 생生을 닦고 닦아

만나는 연인지

젖 먹던 힘까지, 뽀얗게

칼날 같은 긴, 겨울밤

묵언默言으로 피우는

한 점 수묵水墨

고승, 

사미니,

한 몸이나

서로 보며 보지 못하고

적멸寂滅, 바르르, 떠는

황홀한 보궁寶宮이네.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