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시> 장수철 시인 추천『비밀』시편

洪 海 里 2010. 2. 16. 19:31

구두끈

 

洪 海 里

 

저녁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두끈이 풀어져

거치적거리는 것도 모르고

허위허위 걸어왔다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묶어야 할 것은 묶고

매야 할 것은 단단히 매야 하는데

풀어진 구두끈처럼

몸이 풀어져 허우적거린다

풀어진다는 것은

매이고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이고

질기고 단단한 것이 흐늘흐늘해지는 것이고

모두가 해소되고, 잘 섞이어지는 것이다

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구두끈도 때로는 풀어져

한평생 싣고 온 짐을 부리듯

사막길 벗어나는 꿈을 꾸는 것을

나는 이제껏 모른 채 살아왔다

끈은 오로지 묶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구속당하는 것이 유일한 제 임무였다

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몸으로 제가 저를 잡고 있어야 하지만

끈은 늘 풀어지려고 모반을 꾀하고

헐렁해지고 싶어 일탈을 꿈꾼다

때로는 끈을 풀어 푸른 자유를 줘야 하는데

지금까지 나는 구속만 강요해 왔다

이제 몸도 풀어 줘야 할 때가 된 것인가

오늘도 구두끈이 풀어진 것도 모르고

고삐 없는 노마駑馬가 되어

휘적휘적 걸어서 어딘가로 가고 있다.

 

 


반성 

 

네 예쁜 얼굴 너무 많이 봤구나

네 아름다운 목소리 너무 오래 들었구나

네 고운 마음 너무 자주 훔쳐 왔구나

네 고요 속에 너무 깊게 머물렀구나

 

아직도 깰 줄 모르는 나의 어리석은 꿈!

 

 

자벌레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다시 쌓았다

 무너뜨린다.

 

그것이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한평생의 길,

 

山은 몸속에 있는

 무등無等이다.


 

독작하는 봄 

 

앵앵대는 벚나무 꽃그늘 아래

홀로 앉아 술잔을 채우다 보니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 절로 날리고

마음은 자글자글 끓어 쌓는데

가슴속 눌어붙은 천년 그리움

절벽을 뛰어내리기 몇 차례였나

눈먼 그물을 마구 던져대는 봄바람

사랑이 무어라고 바르르 떨까

누가 화궁花宮으로 초대라도 했는가

시린 허공 눈썹길에 발길 멈추면

사는 일 벅차다고 자지러드는 날

햇빛은 초례청의 신부만 같아

얼굴 붉히고 눈길 살풋 던지는데

적멸보궁 어디냐고 묻지 말아라

네 앞에 피어나는 화엄/花嚴을 보라

마저 피지 못한 꽃도 한세상이라고

꽃은 절정에서 스스로 몸을 벗는다

왜 이리 세상이 사약처럼 캄캄해지나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만 절로 날리니

달뜨는 마음 하나 마음대로 잡지 못하네.

 

 

찰나 

 

도화桃花 그늘에 앉아

 

술 한잔 하고 나니,

 

녹수청산綠水靑山 어디 가고

 

홍엽紅葉이 만산滿山,

 

찬서리 내리고

 

백설만 펄펄 분분紛紛하네.

 

 

 방짜징 

 

죽도록 맞고 태어나

평생을 맞고 사는 삶이러니,

 

수천수만 번 두들겨 맞으면서

얼마나 많은 울음의 파문을 새기고 새겼던가

소리밥을 지어 파문에 담아 채로 사방에 날리면

천지가 깊고 은은한 소리를 품어

풀 나무 새 짐승들과

산과 들과 하늘과 사람들이 모두

가슴속에 울음통을 만들지 않는가

바다도 바람도 수많은 파문으로 화답하지 않는가 

나는 소리의 자궁

뜨거운 눈물로 한 겹 한 겹 옷을 벗고

한평생 떨며 떨며 소리로 가는 길마다

울고 싶어서

지잉 징 울음꽃 피우고 싶어

가만히 있으면 죽은 목숨인 나를

맞아야 사는, 맞아야 서는 나를 

때려 다오, 때려 다오, 방자야!

파르르 떠는 울림 있어 방짜인

나는 늘 채가 고파

 

너를 그리워하느니

네가 그리워 안달하느니!

 

 

능소화 전문 

 

올라가야 내려가는 것을, 어찌

모르랴 모르랴마는

너야 죽거나 말거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고

숨통을 끊어야 한다며

흐느적이는 빈 구석 그늘 속으로,

 

몰입이다

황홀이다

착각이다.

 

천파만파 일렁이는 저 바람

막 피어나는 꽃이 눈부시게 흔들려

치렁치렁 그넷줄이 천 길이네

흔들리던 바람이 길을 멈춘 대낮

그넷줄 잡고 있는 진이.

팽팽한 치맛자락 속으로

깊은 뜰

높은 담을 넘어온

화담의 묵향이 번져

허공을 가벼이 뛰어내리는

화려한 절체/절명의

가녀린 유혹.

 

도발이다

일탈이다

광풍이다.

 

 

 시가 죽이지요 

 

시가 정말 죽이네요

시가 죽인다구요

 

내 시가 죽이라니

영양가 높은 전복죽이란 말인가

시래기죽 아니면 피죽이란 말인가

무슨 죽이냐구

식은 죽 먹듯 읽어치울 만큼 하찮단 말인가

내 시가 뭘 죽인다는 말인가

닦달하지 마라

죽은 밍근한 불로 천천히 잘 저으면서 끓여야

제 맛을 낼 수 있지

벼락같이 쓴 시가 잘 쑨 죽맛을 내겠는가

죽은 서서히 끓여야 한다

뜸 들이는 동안

시나 읽을까

죽만 눈독들이고 있으면

죽이 밥이 될까

그렇다고 죽치고 앉아 있으면

죽이 되기는 할까

쓰는 일이나 쑤는 일이나 그게 그거일까

젓가락을 들고 죽을 먹으려 들다니

죽을 맛이지 죽 맛이 나겠는가

저 말의 엉덩이같은 죽사발

미끈 잘못 미끄러지면 파리 신세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사발이 되지

시를 쓴답시구 죽을 쑤고 있는 나

정말 시가 죽이 되어 나를 죽이는구나

쌀과 물이 살과 뼈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맛있는 죽이듯

네 시를 부드럽고 기름지게 끓이거라

 

시가 정말 죽이네요

시가 죽인다구요.


 

황태의 꿈 

 

아가리를 꿰어 무지막지하게 매달린 채

외로운 꿈을 꾸는 명태다, 나는

눈을 맞고 얼어 밤을 지새우고

낮이면 칼바람에 몸을 말리며

상덕 하덕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만선의 꿈

지나온 긴긴 세월의 바닷길

출렁이는 파도로 행복했었나니

부디 쫄태는 되지 말리라

피도 눈물도 씻어버렸다

갈 길은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오늘밤도 북풍은 거세게 불어쳐

몸뚱어리는 꽁꽁 얼어야 한다

해가 뜨면

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새운 나의 꿈

갈가리 찢어져 날아가리라

말라가는 몸속에서

난바다 먼 파돗소리 한 켜 한 켜 사라지고

오늘도 찬 하늘 눈물 하나 반짝인다

바람 찰수록 정신 더욱 맑아지고

얼었다 녹았다 부드럽게 익어가리니

향기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뜨거운 그대의 바다에서 내 몸을 해산하리라.

 

 

 막차가 떠난다

별이 우는 밤이면 막차가 떠난다
산도 울어 계곡 따라 메아리로 흐르고
달빛 속으로 스러져가는
들판의 벗은 바람소리와 함께
마음을 싣고 막차는 떠난다
기적을 울리지 않고 가는 길
눈물 같은 별이 하나씩 길 위에 내리고
새벽은 올 것인가
쓰리게 흐르는 저문 강물이여
밤이 무거워 비켜서지 못하는
나목들 가지마다 걸려 있는
안개, 텅 빈 들녘, 해질 무렵, 넋, 열정,
상처와 환희, 떨어진 꽃잎, 그리고----
모든 존재란 의미이고 이름일 따름
속절없이 피었다 지는 것이 꽃뿐이랴
하늘이 시작되는 곳이 어디인지
상처 받은 별떨기가 찔레꽃으로 피어나는
여름이 봄보다 먼저 왔다 가고 나면
가을은 슬프고 겨울은 눈부시지 않더냐
오늘은 첫눈이 내리고
나는 새벽으로 가는 막차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