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시> 조삼현 시인 추천『비밀』시편

洪 海 里 2010. 2. 19. 04:21

구두끈

 

洪 海 里

 

저녁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두끈이 풀어져

거치적거리는 것도 모르고

허위허위 걸어왔다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묶어야 할 것은 묶고

매야 할 것은 단단히 매야 하는데

풀어진 구두끈처럼

몸이 풀어져 허우적거린다

풀어진다는 것은

매이고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이고

질기고 단단한 것이 흐늘흐늘해지는 것이고

모두가 해소되고, 잘 섞이어지는 것이다

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구두끈도 때로는 풀어져

한평생 싣고 온 짐을 부리듯

사막길 벗어나는 꿈을 꾸는 것을

나는 이제껏 모른 채 살아왔다

끈은 오로지 묶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구속당하는 것이 유일한 제 임무였다

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몸으로 제가 저를 잡고 있어야 하지만

끈은 늘 풀어지려고 모반을 꾀하고

헐렁해지고 싶어 일탈을 꿈꾼다

때로는 끈을 풀어 푸른 자유를 줘야 하는데

지금까지 나는 구속만 강요해 왔다

이제 몸도 풀어 줘야 할 때가 된 것인가

오늘도 구두끈이 풀어진 것도 모르고

고삐 없는 노마駑馬가 되어

휘적휘적 걸어서 어딘가로 가고 있다.

 

 


독작하는 봄 

 

앵앵대는 벚나무 꽃그늘 아래

홀로 앉아 술잔을 채우다 보니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 절로 날리고

마음은 자글자글 끓어 쌓는데

가슴속 눌어붙은 천년 그리움

절벽을 뛰어내리기 몇 차례였나

눈먼 그물을 마구 던져대는 봄바람

사랑이 무어라고 바르르 떨까

누가 화궁花宮으로 초대라도 했는가

시린 허공 눈썹길에 발길 멈추면

사는 일 벅차다고 자지러드는 날

햇빛은 초례청의 신부만 같아

얼굴 붉히고 눈길 살풋 던지는데

적멸보궁 어디냐고 묻지 말아라

네 앞에 피어나는 화엄/花嚴을 보라

마저 피지 못한 꽃도 한세상이라고

꽃은 절정에서 스스로 몸을 벗는다

왜 이리 세상이 사약처럼 캄캄해지나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만 절로 날리니

달뜨는 마음 하나 마음대로 잡지 못하네.

 

 

방짜징 

 

죽도록 맞고 태어나

평생을 맞고 사는 삶이러니,

 

수천수만 번 두들겨 맞으면서

얼마나 많은 울음의 파문을 새기고 새겼던가

소리밥을 지어 파문에 담아 채로 사방에 날리면

천지가 깊고 은은한 소리를 품어

풀 나무 새 짐승들과

산과 들과 하늘과 사람들이 모두

가슴속에 울음통을 만들지 않는가

바다도 바람도 수많은 파문으로 화답하지 않는가 

나는 소리의 자궁

뜨거운 눈물로 한 겹 한 겹 옷을 벗고

한평생 떨며 떨며 소리로 가는 길마다

울고 싶어서

지잉 징 울음꽃 피우고 싶어

가만히 있으면 죽은 목숨인 나를

맞아야 사는, 맞아야 서는 나를 

때려 다오, 때려 다오, 방자야!

파르르 떠는 울림 있어 방짜인

나는 늘 채가 고파

 

너를 그리워하느니

네가 그리워 안달하느니!

 

 

설마雪馬

 

눈처럼 흰 말

눈 속에 사는 말

눈 속을 달려가는 말

 

설마 그런 말이 있기나 하랴마는

눈처럼 흰 설마를 찾아

눈 속으로 나 홀로 헤맨다 한들

 

설마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만

말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말 달려가는 요란한 소리만 들려올 뿐

 

한평생 허위허위 걸어온 길이라 해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막막하니

말꾼 찾아 마량馬糧 준비할 일인가

 

오늘 밤도 눈 쌓이는 소리

창 밖에 환한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 해도

 

나를 비우고 지우면서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설마를 찾아 길 없는 밤길을 나서네.

 

 

비백飛白 

 

그의 글씨를 보면

폭포가 쏟아진다

물소리가 푸르다

언제 터질지 모를

불발탄이 숨겨져 있다

한켠 텅 빈 공간

마음이 비워지고

바람소리 들린다

펑! 터지는 폭발소리에

멈칫 눈길이 멎자

하얀 눈길이 펼쳐진다

날아가던 새들도

행렬을 바꾸어

끼룩대면서

글씨 속에 묻히고 만다

길을 잃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한 구석에보일 듯 말 듯

뒷짐지고 서 있던

그가 화선지에서 걸어 나온다.

 

 

달개비꽃 피다

 

언제 쪽물을 다 뽑아다 꽃을 피웠느냐

여리디여린 물 같은 계집아

네 머리에는 하늘이 내려와

나비날개를 펼쳐 놓았다

모진 세월 멀리 돌아온 사내

허공 한 번 쳐다보고 너 한 번 바라본다

대낮에도 감추지 않고 당당히 드러낸

은밀한 네 쪽문이 환히 열려 있다 

한여름 땡볕에 발가벗겨 내던져도

끄떡도 하지 않는 질긴 계집, 너

저를 뭘로 보느냐고 물었지

물로 본다고 대답은 했지만

발딱발딱 일어서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네 앞에 무릎 꿇어 삼배三拜를 올리고 싶은

해 지고 나서 설핏한 시간

물가 정자에서 시를 읊던 적선謫仙

나비날개로 부채질을 하다

낮에 마신 술이 좀 과했는지

계집의 쪽치마를 끌어다 입술을 닦고 있다.

 

 

황금 여인黃金女人 

 

금값이 날마다 사상 최고치를 경신更新하고 있다

이제는 황금을 경신敬信, 아니 경신敬神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황금 여인을 모시기로 했다

여신 계약을 하고 여신女神으로 모시면

나의 신을 위해서면 무슨 거짓말을 못 하랴

도둑질이나 살인인들 하지 못할까

신을 벗은 맨발이면 또 어떠랴, 허나

나의 신은 이제 늙고 낡아서 축 처져 있다

저렇게 당당히 서 있는 여인을 보면

주눅좋아 펄펄해야 할 텐데, 이미

주눅이 들어 어쩔 줄 모르지만

이제 새 신을 모시고 살리라, 그러면

신이 지펴 모든 것을 훤히 알 날이 오리라

얼마나 신이 나고 신명이 오를 것인가

새 신을 신고 폴짝 뛰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허나 모든 것이 신의 잘못이옵니다를 되뇌며

함부로 손도 대지 못하고 신을 바라봐야 한다

황금만능 시대에는 황금이 신보다 확실하다

황금이 이제 절정에 다다랐다

내 여인도 절정이면 울고불고 난리가 아니지만

절정絶頂은 내리막길이라 정절情節의 한숨뿐,

내 여신만 모시고 살면 안 될 일이 무엇이고

못 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해도

신을 아는 사람들이 더 지독하다 한다

신을 철석 같이 믿는 이들이 더 무섭다니

도대체 신은 무엇인가  철인가 석인가

아무래도 석장石腸이 못 되는 나는 신을 보내 드리고

당초의 빈손 빈 몸으로 살아야겠다, 바보!

비웃적거리지 마라 어처구니들아

성지 순례단이 되어 이곳으로 몰려오는

돈 사람들은 황금 여신 주위를 뱅뱅 돌다

돈이 아닌 돌이 되고 말겠지만…….

 

 

 비밀 

 

그 여자 귀에 들어가면

세상이 다 아는 건 시간문제다

조심하라 네 입을 조심하라

그녀의 입은 가볍고 싸다

무겁고 비싼 네 입도 별수없지만

혼자 알고 있기엔 아깝다고

입이 근지럽다고

허투루 발설 마라

말끝에 말이 난다

네 말 한 마리가 만의 말을 끌고 날아간다

말이란 다산성이라 새끼를 많이 낳는다

그 여자 귀엔 천 마리 파발마가 달리고 있다

말은 발이 없어 빨리 달린다, 아니, 난다

그러니 남의 말은 함부로덤부로 타지 마라

말발굽에 밟히면 그냥 가는 수가 있다

그 여자 귓속에는 세상의 귀가 다 들어 있다 

그 여자 귀는 천 개의 나발이다

그녀는 늘 나발을 불며 날아다닌다

한번, 그녀의 귀에 들어가 보라

새끼 낳은 늙은 암퇘지 걸근거리듯

그녀는 비밀肥蜜을 먹고 비밀秘密을 까는 촉새다

'이건 너와 나만 아는 비밀이다'.

 

 

시가 죽이지요 

 

시가 정말 죽이네요

시가 죽인다구요

 

내 시가 죽이라니

영양가 높은 전복죽이란 말인가

시래기죽 아니면 피죽이란 말인가

무슨 죽이냐구

식은 죽 먹듯 읽어치울 만큼 하찮단 말인가

내 시가 뭘 죽인다는 말인가

닦달하지 마라

죽은 밍근한 불로 천천히 잘 저으면서 끓여야

제 맛을 낼 수 있지

벼락같이 쓴 시가 잘 쑨 죽맛을 내겠는가

죽은 서서히 끓여야 한다

뜸 들이는 동안

시나 읽을까

죽만 눈독들이고 있으면

죽이 밥이 될까

그렇다고 죽치고 앉아 있으면

죽이 되기는 할까

쓰는 일이나 쑤는 일이나 그게 그거일까

젓가락을 들고 죽을 먹으려 들다니

죽을 맛이지 죽 맛이 나겠는가

저 말의 엉덩이같은 죽사발

미끈 잘못 미끄러지면 파리 신세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사발이 되지

시를 쓴답시구 죽을 쑤고 있는 나

정말 시가 죽이 되어 나를 죽이는구나

쌀과 물이 살과 뼈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맛있는 죽이듯

네 시를 부드럽고 기름지게 끓이거라

 

시가 정말 죽이네요

시가 죽인다구요.

 

 

한 끼 식사 

 

겨우내 이 나무 저 나무로

동가식서가숙하던

직박구리 한 쌍

매화꽃 피었다고 냉큼 찾아왔다

 

여름도 한겨울이던 50년대

물로 배를 채우던 시절

꿀꿀이죽은 꿀꿀대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맛이야 꿀맛이 아니었던가

 

가지마다 사푼사푼 옮겨 앉아

꽃치마 속에 뾰족한 부리를 박고

쪽쪽, 쪽쪽! 빨고 있다

참 아름다운, 황홀한 식사다

 

놀란 꽃송이들 속치마까지 홀홀

벗어 던지니

이른 봄날 마른하늘에 눈 내린다

금세 매화나무 배불러오겠다.


빈집에는 그리움이 살고 있다 

 

발자국 소리 가까이 오고 있는지

찻소리 들리는지

귀마다 가득가득 이명이 울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앞산을 바라보나

첩첩하기 그지없고

하늘을 올려다봐도

막막하기 하릴없다.

 

여보세요, 계세요, 문을 두드려도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쥐 죽은 듯 하오의 햇살만 놀고 있는

텅 빈 마당 한 켠

살구나무가 주인을 기다리다

팔을 뻗어 바깥세상으로

살구 몇 알 떨어뜨렸다.

 

 

인화에게

 

인화, 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푸른 풀밭이 아래위로 펼쳐져 있고

일곱 개 십자 막대의 울타리 목장

함치르르한 풀밭으로

함함한 양을 몰고 가는 그의 흰 손 

무작정 가고 있는 양은 착하다

눈빛이 순한 천사다 

풀밭이 다하면

절벽,

바람이 절벽을 타듯

양은 절벽을 오른다

첫 입맞춤을 하고

처음으로 속삭이는 말처럼

하늘 아래 자명自鳴하는 것은

환하다, 자명自明하다

해 지는 곳이

함지陷池이든 함지咸地이든 무슨 상관이랴 

끝없이 펼쳐진 풀밭을

양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풀밭에 양 발자국이 없는 것은

하늘에 찍히기 때문이다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