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시> 이동훈 시인 추천『비밀』시편

洪 海 里 2010. 2. 13. 08:21

설마雪馬

 

洪 海 里

 

 

눈처럼 흰 말

눈 속에 사는 말

눈 속을 달려가는 말

 

설마 그런 말이 있기나 하랴마는

눈처럼 흰 설마를 찾아

눈 속으로 나 홀로 헤맨다 한들

 

설마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만

말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말 달려가는 요란한 소리만 들려올 뿐

 

한평생 허위허위 걸어온 길이라 해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막막하니

말꾼 찾아 마량馬糧 준비할 일인가

 

오늘 밤도 눈 쌓이는 소리

창 밖에 환한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 해도

 

나를 비우고 지우면서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설마를 찾아 길 없는 밤길을 나서네.

 

 

 구두끈

 

저녁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두끈이 풀어져

거치적거리는 것도 모르고

허위허위 걸어왔다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묶어야 할 것은 묶고

매야 할 것은 단단히 매야 하는데

풀어진 구두끈처럼

몸이 풀어져 허우적거린다

풀어진다는 것은

매이고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이고

질기고 단단한 것이 흐늘흐늘해지는 것이고

모두가 해소되고, 잘 섞이어지는 것이다

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구두끈도 때로는 풀어져

한평생 싣고 온 짐을 부리듯

사막길 벗어나는 꿈을 꾸는 것을

나는 이제껏 모른 채 살아왔다

끈은 오로지 묶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구속당하는 것이 유일한 제 임무였다

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몸으로 제가 저를 잡고 있어야 하지만

끈은 늘 풀어지려고 모반을 꾀하고

헐렁해지고 싶어 일탈을 꿈꾼다

때로는 끈을 풀어 푸른 자유를 줘야 하는데

지금까지 나는 구속만 강요해 왔다

이제 몸도 풀어 줘야 할 때가 된 것인가

오늘도 구두끈이 풀어진 것도 모르고

고삐 없는 노마駑馬가 되어

휘적휘적 걸어서 어딘가로 가고 있다.

 

 

 11월, 낙엽

 

울며불며 매달리지 마라

의초롭던 잎의 한때는 꿈이었느니

때가 되면 저마다 제 갈 길로 가는 법

애걸하고 복걸해도 소용없는 일

차라리 작별인사를 눈으로 하면

하늘에는 기러기 떼로떼로 날고 있다

한겨울에 꼿꼿이 서 있기 위해, 나무는

봄부터 푸르도록 길어올리던 물소리

자질자질 잦아들고 있다

몸도 마음도 다 말라버려서

비상 먹은 듯, 비상을 먹은 듯

젖은 몸의 호시절은 가고 말았다

무진무진

살아 보겠다고 늦바람 피우지 마라

지빈至貧하면 어떻고 무의無依하면 어떠랴

어차피 세상은 거대한 감옥

너나 나나 의지도 가지도 없는

허공의 사고무친 아니겠느냐 

축제는 언제나 텅 빈 마당

파장의 적막이 그립지 않느냐

죽은 새에게는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듯

모든 것이 멀리 보이고

나도 이제 멀리 와 있다

세상의 반반한 것들도 어차피 반반이다.

 

 

 불여자

 

늘 줄 줄밖에 몰라 금방 거덜나고 마는

열화가 가득 차 있는 투명한 물화산인 나

사내들이란 하는 수 없는 작자들이어서

내 몸을 으스러지게 움켜잡고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을 들이대곤 하지

내 생각만 해도 불끈불끈 일어선다고

날 만나면 별수없이 나발을 불게 된다고

이내 고래가 되어 아귀餓鬼처럼 웃지

싸늘한 내 입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는

부산이 아니라도 사내들은 부산스럽고

잔마다 말들이 뜨거워 불꽃이 튀지

나를 만나면 사내들은 눌러듣지 못하고

술발이 오른다고 술이 받는다고 쎈 척하나

오르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는

사내들은 스스로 불이 되어 이내 타오르고

술잔에 붉은 얼굴이 욜랑욜랑거리다

휴지조각처럼 몸뚱어리가 무너지고 말지

숯검정이 된 그들 곁에 널브러진 나

내 속에서 생도 절로 저물어 꺼져가고

밥이 눌 듯 누렇게 부은 얼굴이 되어

시계도 취해서 시간은 언제나 죽어 있지

무정 세월과 풍진 세상을 울고 있는

가뭇없이 풍경이 되어버린 나

목마른 파도처럼 꺼이꺽꺽 울고 있을 때

스산한 그리움만 속절없이 상처로 남아

드디어 박살이 나 자유를 얻는 나,

푸른 소주병.

 

 

 보리누름

 

보리들이 몸을 포개 눕던 밤

별들이 유난히도 밝았다

하늘문을 뚫고 내려다보는

눈들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꼬올깍,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

어디선가

고양이 우는 소리 흥건히 젖어 있었다

숨 가쁜 달은 구름으로 몸을 숨기고

고라니가 자고 간 자리

헐떡이는 보리누름

단내 나는 거친 숨소리만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때늦은 밤꽃이 가불가불 발갛게 익고

별똥별이 하늘을 긋는 밤이었다

쏙쏙쏙쏙 쏙독새 소리 보리밭을 흔들었다.

 

 

 벌금자리

 

벼룩자리 벼룩은 어디로  튀고

어쩌다 벌금자리가 되었을까

청보리 한창 익어갈 때면 이랑마다

그녀가 머리 흐트러진 줄도 모르고

살보시하려 달뜬 가슴을 살포시 풀어헤쳐

천지간에 단내가 폴폴 나는 것이었다

벼락같이 달려드는 바람의 보드란 혀

다디단 세상이 갑자기 캄캄해져서

옆집 달래까지 덩달아 달떠 달싹달싹하는 바람에

땅바닥에 죽은 듯 엎어져 있는 것이

차라리 살아 있는 것이라고 옆찔러 주었다

허리를 굽히고 가만히 내려다봐야

겨우 눈에 뜨이는 벌금자리

해말간 열일곱의 애첩 같은 그녀

흐벅진 허벅지는 아니라 해도

잦은 투정에 식은땀이 흐르는 한밤

얼마나 뒤척이며 흐느꼈는지

가슴속 빈자리가 마냥 젖어서

사는 일이 낭떠러지, 벼랑이라고

벌금벌금 벌금을 내면서도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그녀는 작은 등롱에 노란 꽃밥을 들고 있었지만

한낮이면 뜨거운 볕으로 콩을 볶는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독작하는 봄

 

앵앵대는 벚나무 꽃그늘 아래

홀로 앉아 술잔을 채우다 보니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 절로 날리고

마음은 자글자글 끓어 쌓는데

가슴속 눌어붙은 천년 그리움

절벽을 뛰어내리기 몇 차례였나

눈먼 그물을 마구 던져대는 봄바람

사랑이 무어라고 바르르 떨까

누가 화궁花宮으로 초대라도 했는가

시린 허공 눈썹길에 발길 멈추면

사는 일 벅차다고 자지러드는 날

햇빛은 초례청의 신부만 같아

얼굴 붉히고 눈길 살풋 던지는데

적멸보궁 어디냐고 묻지 말아라

네 앞에 피어나는 화엄/花嚴을 보라

마저 피지 못한 꽃도 한세상이라고

꽃은 절정에서 스스로 몸을 벗는다

왜 이리 세상이 사약처럼 캄캄해지나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만 절로 날리니

달뜨는 마음 하나 마음대로 잡지 못하네.

 

 

 강가에 서다

  

왜 강가에 서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다보는가

 

텅 빈 가슴으로

어처구니 빠진 맷돌처럼

우두커니 서서, 망연자실,

물결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은

 

다 잃고 나면

다 잊고 나면

다 버리고 나면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착해지고 싶어서일까

 

새벽마다 정화수井華水 길어다 놓고

정성 다해 손 모으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치성 들이듯

재를 올리듯

 

다 씻어버리고 싶어서

다 흘려보내고 싶어서

오늘도 빈 웃음을 허공에 날리며

막막히 강물만 바라보고 있는가.

 

 

 꽃무릇 천지

 

우리들이 오가는 나들목이 어디런가

너의 꽃시절을 함께 못할 때

나는 네게로 와 잎으로 서고

나의 푸른 집에 오지 못할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으로 피어라

나는 너의 차꼬가 되고

너는 내 수갑이 되어

속속곳 바람으로

이 푸른 가을날 깊은 하늘을 사무치게 하니

안안팎으로 가로 지나 세로 지나 가량없어라

짝사랑이면 짝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사랑이라서

나는 죽어 너를 피우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가

나란히 누워보지도 못하고

팔베개 한 번 해 주지 못한 사람

촛불 환히 밝혀 들고 두 손을 모으면

너는 어디 있는가

마음만, 마음만 붉어라.

 

 

 

 시가 죽이지요

  

시가 정말 죽이네요

시가 죽인다구요

 

내 시가 죽이라니

영양가 높은 전복죽이란 말인가

시래기죽 아니면 피죽이란 말인가

무슨 죽이냐구

식은 죽 먹듯 읽어치울 만큼 하찮단 말인가

내 시가 뭘 죽인다는 말인가

닦달하지 마라

죽은 밍근한 불로 천천히 잘 저으면서 끓여야

제 맛을 낼 수 있지

벼락같이 쓴 시가 잘 쑨 죽맛을 내겠는가

죽은 서서히 끓여야 한다

뜸 들이는 동안

시나 읽을까

죽만 눈독들이고 있으면

죽이 밥이 될까

그렇다고 죽치고 앉아 있으면

죽이 되기는 할까

쓰는 일이나 쑤는 일이나 그게 그거일까

젓가락을 들고 죽을 먹으려 들다니

죽을 맛이지 죽 맛이 나겠는가

저 말의 엉덩이같은 죽사발

미끈 잘못 미끄러지면 파리 신세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사발이 되지

시를 쓴답시구 죽을 쑤고 있는 나

정말 시가 죽이 되어 나를 죽이는구나

쌀과 물이 살과 뼈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맛있는 죽이듯

네 시를 부드럽고 기름지게 끓이거라

 

시가 정말 죽이네요

시가 죽인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