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시> 황연진 시인 추천《비밀》시편

洪 海 里 2010. 2. 12. 05:05

설마雪馬

 

洪 海 里

 

 

눈처럼 흰 말

눈 속에 사는 말

눈 속을 달려가는 말

 

설마 그런 말이 있기나 하랴마는

눈처럼 흰 설마를 찾아

눈 속으로 나 홀로 헤맨다 한들

 

설마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만

말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말 달려가는 요란한 소리만 들려올 뿐

 

한평생 허위허위 걸어온 길이라 해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막막하니

말꾼 찾아 마량馬糧 준비할 일인가

 

오늘 밤도 눈 쌓이는 소리

창 밖에 환한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 해도

 

나를 비우고 지우면서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설마를 찾아 길 없는 밤길을 나서네.

 

 

 타작打作

 

엊저녁에는 밤새도록 깨를 털었다

깻단을 두드리지 않아도

깨가 투두둑투두둑 쏟아져 내렸다

흰깨 검은깨

볶지 않아도 고소한 냄새

방안에 진동했다

날이 희붐하게 새었을 때

머리맡에 놓인 멍석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시의 씨앗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런 날 밤이면

하늘에는 갓밝이까지 잔치가 벌어지고

별들이 마구 뛰어내렸다

아침이 되자

깨가 쏟아질까 쏟아질까

키를 들고 시를 까부르고 있었다

까불까불.

 

 

 계영배戒盈杯

 

속정 깊은 사람 가슴속

따르고 따루어도 가득 차지 않는

잔 하나 감춰 두고

한마悍馬 한 마리 잡아타고

먼 길 같이 떠나고 싶네

마음 딴 데 두지 마라, 산들라

세상에 가장 따순 네 입술 같이나

한잔 술이 내 영혼을 데우는 것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그리움처럼

줄지도 넘치지도 않는 술잔 위로

별들이 내려 빙글빙글 도는 것은,

무위無爲도 자연自然도 아니어서

내 마음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인가

은자隱者의 눈빛이나 미소처럼

입안 가득 번지는 넉넉한 향을

눈물로 태울까 말씀으로 비울까

온몸으로 따루어도

채워지지 않고 비워지지 않는

잔,

깊고 따뜻한 너.

 

 

콩새야

 

콩새야

콩새야

 

느릅나무에 앉아만 있지 말고

 

콩밭에 가서 놀아라

 

겨울이 오기 전에

 

작두콩이나 한 알 물어 오너라

칼이나 하나 차고 오너라.

 

 

 황금 여인黃金女人 

 

금값이 날마다 사상 최고치를 경신更新하고 있다

이제는 황금을 경신敬信, 아니 경신敬神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황금 여인을 모시기로 했다

여신 계약을 하고 여신女神으로 모시면

나의 신을 위해서면 무슨 거짓말을 못 하랴

도둑질이나 살인인들 하지 못할까

신을 벗은 맨발이면 또 어떠랴, 허나

나의 신은 이제 늙고 낡아서 축 처져 있다

저렇게 당당히 서 있는 여인을 보면

주눅좋아 펄펄해야 할 텐데, 이미

주눅이 들어 어쩔 줄 모르지만

이제 새 신을 모시고 살리라, 그러면

신이 지펴 모든 것을 훤히 알 날이 오리라

얼마나 신이 나고 신명이 오를 것인가

새 신을 신고 폴짝 뛰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허나 모든 것이 신의 잘못이옵니다를 되뇌며

함부로 손도 대지 못하고 신을 바라봐야 한다

황금만능 시대에는 황금이 신보다 확실하다

황금이 이제 절정에 다다랐다

내 여인도 절정이면 울고불고 난리가 아니지만

절정絶頂은 내리막길이라 정절情節의 한숨뿐,

내 여신만 모시고 살면 안 될 일이 무엇이고

못 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해도

신을 아는 사람들이 더 지독하다 한다

신을 철석 같이 믿는 이들이 더 무섭다니

도대체 신은 무엇인가  철인가 석인가

아무래도 석장石腸이 못 되는 나는 신을 보내 드리고

당초의 빈손 빈 몸으로 살아야겠다, 바보!

비웃적거리지 마라 어처구니들아

성지 순례단이 되어 이곳으로 몰려오는

돈 사람들은 황금 여신 주위를 뱅뱅 돌다

돈이 아닌 돌이 되고 말겠지만…….

 

 

 비밀 

 

그 여자 귀에 들어가면

세상이 다 아는 건 시간문제다

조심하라 네 입을 조심하라

그녀의 입은 가볍고 싸다

무겁고 비싼 네 입도 별수없지만

혼자 알고 있기엔 아깝다고

입이 근지럽다고

허투루 발설 마라

말끝에 말이 난다

네 말 한 마리가 만의 말을 끌고 날아간다

말이란 다산성이라 새끼를 많이 낳는다

그 여자 귀엔 천 마리 파발마가 달리고 있다

말은 발이 없어 빨리 달린다, 아니, 난다

그러니 남의 말은 함부로덤부로 타지 마라

말발굽에 밟히면 그냥 가는 수가 있다

그 여자 귓속에는 세상의 귀가 다 들어 있다 

그 여자 귀는 천 개의 나발이다

그녀는 늘 나발을 불며 날아다닌다

한번, 그녀의 귀에 들어가 보라

새끼 낳은 늙은 암퇘지 걸근거리듯

그녀는 비밀肥蜜을 먹고 비밀秘密을 까는 촉새다

'이건 너와 나만 아는 비밀이다'.

 

 

 달개비꽃 피다

 

언제 쪽물을 다 뽑아다 꽃을 피웠느냐

여리디여린 물 같은 계집아

네 머리에는 하늘이 내려와

나비날개를 펼쳐 놓았다

모진 세월 멀리 돌아온 사내

허공 한 번 쳐다보고 너 한 번 바라본다

대낮에도 감추지 않고 당당히 드러낸

은밀한 네 쪽문이 환히 열려 있다 

한여름 땡볕에 발가벗겨 내던져도

끄떡도 하지 않는 질긴 계집, 너

저를 뭘로 보느냐고 물었지

물로 본다고 대답은 했지만

발딱발딱 일어서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네 앞에 무릎 꿇어 삼배三拜를 올리고 싶은

해 지고 나서 설핏한 시간

물가 정자에서 시를 읊던 적선謫仙

나비날개로 부채질을 하다

낮에 마신 술이 좀 과했는지

계집의 쪽치마를 끌어다 입술을 닦고 있다.

 

 

 벌금자리

  

벼룩자리 벼룩은 어디로  튀고

어쩌다 벌금자리가 되었을까

청보리 한창 익어갈 때면 이랑마다

그녀가 머리 흐트러진 줄도 모르고

살보시하려 달뜬 가슴을 살포시 풀어헤쳐

천지간에 단내가 폴폴 나는 것이었다

벼락같이 달려드는 바람의 보드란 혀

다디단 세상이 갑자기 캄캄해져서

옆집 달래까지 덩달아 달떠 달싹달싹하는 바람에

땅바닥에 죽은 듯 엎어져 있는 것이

차라리 살아 있는 것이라고 옆찔러 주었다

허리를 굽히고 가만히 내려다봐야

겨우 눈에 뜨이는 벌금자리

해말간 열일곱의 애첩 같은 그녀

흐벅진 허벅지는 아니라 해도

잦은 투정에 식은땀이 흐르는 한밤

얼마나 뒤척이며 흐느꼈는지

가슴속 빈자리가 마냥 젖어서

사는 일이 낭떠러지, 벼랑이라고

벌금벌금 벌금을 내면서도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그녀는 작은 등롱에 노란 꽃밥을 들고 있었지만

한낮이면 뜨거운 볕으로 콩을 볶는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방짜징

 

죽도록 맞고 태어나

평생을 맞고 사는 삶이러니,

 

수천수만 번 두들겨 맞으면서

얼마나 많은 울음의 파문을 새기고 새겼던가

소리밥을 지어 파문에 담아 채로 사방에 날리면

천지가 깊고 은은한 소리를 품어

풀 나무 새 짐승들과

산과 들과 하늘과 사람들이 모두

가슴속에 울음통을 만들지 않는가

바다도 바람도 수많은 파문으로 화답하지 않는가 

나는 소리의 자궁

뜨거운 눈물로 한 겹 한 겹 옷을 벗고

한평생 떨며 떨며 소리로 가는 길마다

울고 싶어서

지잉 징 울음꽃 피우고 싶어

가만히 있으면 죽은 목숨인 나를

맞아야 사는, 맞아야 서는 나를 

때려 다오, 때려 다오, 방자야!

파르르 떠는 울림 있어 방짜인

나는 늘 채가 고파

 

너를 그리워하느니

네가 그리워 안달하느니!

 

 

 까치와 권총

 

꿈속에서 까치가 떼지어 우짖고 있었다

머리맡에 시 한 편 놓여 있었다

까치 몇 마리 날아와 앉아 있었다

시안詩眼이 갓난아기 눈처럼  맑았다

동그랗게 빛났다

아기의 손에 이쁜 권총이 들려져 있었다

총을 쏘아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눈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관음觀音이란 말이 그래서 생겼다

화약 냄새가 한겨울의 매화 향기 같았다

사람들은 향기를 귀로 맡고 있었다

문향聞香이란 말은 그런 것이었다.

 

 

 8월

- 선연嬋娟

 

가진 것 없이 몸 벗어놓고

울다 가는 한 生이니

집도 절도 필요없다고

 

속으로 속으로 참지 못하고

나무에 달라붙어 시퍼렇게 내뽑는

투명한 가락 따라

 

한 生이 천추千秋인가 만세萬歲인가

이승과 저승을 잡고 있는

노래가 비소처럼 바래고 있다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칠흑의 한도 우름우름 날아가고

둥치에 달아놓은  낡은 집 한 채

 

길다, 8월!

 

 

 비백飛白 

 

그의 글씨를 보면

폭포가 쏟아진다

물소리가 푸르다

언제 터질지 모를

불발탄이 숨겨져 있다

한켠 텅 빈 공간

마음이 비워지고

바람소리 들린다

펑! 터지는 폭발소리에

멈칫 눈길이 멎자

하얀 눈길이 펼쳐진다

날아가던 새들도

행렬을 바꾸어

끼룩대면서

글씨 속에 묻히고 만다

길을 잃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한 구석에보일 듯 말 듯

뒷짐지고 서 있던

그가 화선지에서 걸어 나온다.

 

 

황태의 꿈

 

아가리를 꿰어 무지막지하게 매달린 채

외로운 꿈을 꾸는 명태다, 나는

눈을 맞고 얼어 밤을 지새우고

낮이면 칼바람에 몸을 말리며

상덕 하덕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만선의 꿈

지나온 긴긴 세월의 바닷길

출렁이는 파도로 행복했었나니

부디 쫄태는 되지 말리라

피도 눈물도 씻어버렸다

갈 길은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오늘밤도 북풍은 거세게 불어쳐

몸뚱어리는 꽁꽁 얼어야 한다

해가 뜨면

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새운 나의 꿈

갈갈이 찢어져 날아가리라

말라가는 몸속에서

난바다 먼 파돗소리 한 켜 한 켜 사라지고

오늘도 찬 하늘 눈물 하나 반짝인다

바람 찰수록 정신 더욱 맑아지고

얼었다 녹았다 부드럽게 익어가리니

향기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뜨거운 그대의 바다에서 내 몸을 해산하리라.

 

 

 화택火宅

꽃과 벌 사이
속절없어
꽃이라는 이름으로 쓰는
한 줄 유서
날 가물어
황토 먼지 일어도
마음 젖어 무거운 길
대낮 햇살 속
하얀 찔레꽃
타는 입술 찍어
너는 물의 집 한 채
나는 불의 집 한 채
엮고 또 지우면서
봄날은 간다.

 

 

 막차가 떠난다

별이 우는 밤이면 막차가 떠난다
산도 울어 계곡 따라 메아리로 흐르고
달빛 속으로 스러져가는
들판의 벗은 바람소리와 함께
마음을 싣고 막차는 떠난다
기적을 울리지 않고 가는 길
눈물 같은 별이 하나씩 길 위에 내리고
새벽은 올 것인가
쓰리게 흐르는 저문 강물이여
밤이 무거워 비켜서지 못하는
나목들 가지마다 걸려 있는
안개, 텅 빈 들녘, 해질 무렵, 넋, 열정,
상처와 환희, 떨어진 꽃잎, 그리고----
모든 존재란 의미이고 이름일 따름
속절없이 피었다 지는 것이 꽃뿐이랴
하늘이 시작되는 곳이 어디인지
상처 받은 별떨기가 찔레꽃으로 피어나는
여름이 봄보다 먼저 왔다 가고 나면
가을은 슬프고 겨울은 눈부시지 않더냐
오늘은 첫눈이 내리고
나는 새벽으로 가는 막차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