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洪 海 里
싸락눈 싸락싸락 싸르락싸락
눈 내려 지상에 백지를 깔아주자
수천수만 마리의 황태가
눈도 내려깔지 않고
몸뚱어리 흔들어 유서를 쓰고 있다.
바닷속에서 그리도 유연하게 흐르던 초서
지상에서는 왜 이리 뻣뻣하게 힘이 드는지
꼬리지느러미의 글씨마다 뼈가 솟는다.
상덕 하덕에 코를 꿰인 채
눈발은 딱 벌린 아가리로 무작정 들어가고
마침내 온몸의 검은 피 다 쏟아낸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로
마지막 한 자 한 자 휙휙 적다
눈이 오지 않는 한밤이면
황태는 싸늘하게 죽은 작은 별들을
몸으로 맞아들여 따뜻하게 품어 준다.
저 숱한 별들이 황태의 몸속에서
간절하고도 도저한 힘이 되어
칼바람에 흔들리며 쓰는 일필휘지,
조상들의 유서가 깊은 이 골짜기에서
온몸에 문신으로 새기고 있다
얼어붙은 유서를.
- 시집『독종』(2012,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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