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구두
- 林步調
洪 海 里
부처님 오신 날 마당의 풀을 뽑으면서
불경은 읽지 않고 불경스럽게도 삼겹살이나 굽자 할까 했는데
들어와 보니 전화가 여러 차례 와 쌓여 있었다
삼겹살보다 낫다는 오리고기로 점심을 하며
막걸리 한잔에 시간을 되돌리다 보니
우이동으로 이사한 후의 추억 몇 장을 그댁 사모님께서 펼치신다
강우원진이는 여학교 때 제자다
예쁘고 공부 잘하고 애교 많던 반장 소녀
그녀가 임보 시인의 장녀다
어느 날 퇴근하면서 신발장을 여니 찬바람이 일었다
녀석들이 장난을 친 것이었다
여기저기 뒤져 봐도 '날 찾아 봐라' 였다
어쩔 수 없이 슬리퍼를 끌고 돌아서는 꼴에
녀석들은 숨어서 낄낄대며 얼마나 신이 났을까
그게 선생을 좋아한다는 여학생들의 표현이었다
그러다 주동인 우원진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더란다
구두를 사 가지고 비를 맞고 달려온 모녀에게
몇 년간 풋내기 교사였던 우리집 사모님은 어린 교사답게
그게 아니라고 한마디 하셨던가 보다
우리집 사모님은 으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말씀이 40년 가깝도록 그댁 사모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던 것
말이란 징을 박지 않아도 발길질이 심한 법이라서
그 비참하고 창피했던 비에 젖은 기억을 잊지 못하다
석탄일에 풀었으니 이제 속이 얼마나 후련하실까
전화를 끊기 무섭게 달려나가는
시인을 보고 해리와 샐리라고 그댁 딸들이 야단이란다
구두는 발의 집이다
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영혼이 떠나 금방 무너진다
신지 않는 구두는 스스로 몸을 줄여
쓸모 없는 가죽때기가 되고 만다
나의 구두가 쓰레기통 속에서 소녀들의 사랑으로
멋진 길을 내며 멀리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오던 소녀들
지금도 교복을 날개로 달고 날아올 수 없을까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 시집『독종』(2012, 북인)
- 2018 우리詩여름시인학교 작품집에 게재.
(2018. 8. 25~26. 괴산청소년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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