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독종毒種』2012

<시> 산책

洪 海 里 2012. 6. 1. 04:55

 

 

산책

洪 海 里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 시집『독종』(2012, 북인)  - 월간《우리詩》2012. 8월호

 


* 스크린도어 앞에서 이 시를 접할 때 나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시는 시가 갖춰야 할 쾌락적 기능과 교훈적 기능을 모두 갖췄다. '산책'이라는 말에서 '돈을 주고 산 책',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산 책'을 떠올리며 교묘한 언어유희를 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쾌락적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아울러 산책을 '자연경'이라는 경전을 읽는 행위로 승화시키며 살아가며 '산책'뿐만 아니라 '책'을 통해 철학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각성을 깨우쳐 준다. 이보다 확실한 교훈적 기능이 또 어디 있겠는가? 시가 갖춰야 할 창의성과 적절한 비유와 상징, 그리고 언어유희를 통한 시적 향유의 묘미를 깨닫게 한다. 이런 시 정말 좋다.
그렇다고 모두 이런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한 편의 시를 통해 쾌락적 기능과 교훈적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시를 창작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의 기본을 착실히 익혀야 한다. 축구선수가 축구규칙을 익히듯이 시인으로서 시의 규칙을 확실하게 익혀나가야 한다.

 

"서울시 지하철 스크린도어 게시 시 공모에 부쳐"
‘허접한 시’라고 돌멩이 던지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정말 허접한 변명
17.07.19 01:15l이인환(yakyeo)
-OhmyNews에서 옮김.

 

* 할 수 있으면 가볍게 발을 떼려고 한다. 둔한 몸이지만 마음을 가뿐히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산책이 산 책이 되려면 무엇을 찾고자 하는 의무감을 먼저 벗어야 한다.

자리를 떠나고 새로운 경치가 눈에 드는 것도 좋은데, 한 발 한 발 짐 하나 덜어내는 홀가분한 걸음이 더 좋다.

  그리하여 내 산책은 주로 저녁 걸음이다.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아침 발걸음이 설레기도 하겠지만, 종일 묻은 때 씻어내는 방법으로 으뜸이다.

이처럼 묵은 생각을 느릿느릿 놓고 가는 마음이 산책의 원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뜻밖에 살아있는 경을 만나 읽는 날이 있다.

          - 금 강.

 

 

 

              * 각시붓꽃 : 우이도원에서 임계순 님 촬영(2012. 4. 29. '三角山詩花祭'에서)

 

* 「산책」초고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책이다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읽는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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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은 살아 있는 교과서다.
이 또한 얼마나 신선한 발상인가.

신선의 경지에 도달한 듯한 시인의 마음은 자연과 교감한다.
자연은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다. 
그 무엇이 되겠다고 치고 박는 아비규환 같은 일상을 벗어나 넉넉한 마음으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저들을 안쓰럽게 내려다보는 신선의 마음을 엿보는 것은 나만의 상상일까.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서 시를 굳이 길게 써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길게 쓰지 않으면서도 행간에 뜻을 숨겨두어서 그것을 들춰보게 하는 고도의 전략은 시 공부를 하는

모든 이들의 교과서가 아닐까.

- 김성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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