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정읍사井邑詞

洪 海 里 2013. 1. 17. 05:24

 

 

정읍사井邑詞


 

洪 海 里

 

 

1. 사내의 말

나라가 저자요
저자가 젖었으니
내 어찌 젖지 않을 수 있으랴
밝디 밝던 달빛 사라지고
어둔 길 홀로 돌아가네
한낱 꿈길이라는 인생살이
눈물나라일 뿐인가
떨어진 미투리
버선목의 때
가래톳이 서도록 헤매여도
술구기 한 두 잔에 정을 퍼주는
들병이의 살꽃
한 송이 꺾지 못하고
빈대 벼룩에 잠 못 이룰 제
주막집 흙벽마다
붉은 난초만 치네
풀어진 신들메
황토길 넘어가는 칼칼한 목
정 어리는 주모
방구리 인 통지기
아래품 해우채도 못 되는
등짐만 허우적이며
저자거리에 젖어 있는
나, 이제 돌아가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2. 계집의 말

달돋는 밤이 오면
산 위에 서네

고갯마루 목 빠지게
머리푼 달빛만이 천지에 가득하고

저자거리 아랫녘 장수
허방다리 허물어지던

당신의 그림자
중다버지 떠돌이 더펄더펄

밤이면 눈물로 젖고
낮이면 돌로 서네

가슴에 지는 꽃잎 새 되어 날아
젖은 날개 퍼덕일 때

당신 계신 젖은 나라
햇빛나라 금빛나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 시집『대추꽃 초록빛』(1987)

 

 

* 홍해리의 시 <정읍사>는 원 텍스트의 원형을 보호하면서 재창조되었다. 진단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잇는 홍해리는 다른 진단시의 동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서 시를

찾고자 했다. 이 시는 원 텍스트의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사내와 계집을 화자로 구정하

여 이야기하는 시적 전개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원 텍스트와는 확연히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이 시는 남편의 개인적 신변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시대적 솽황을 설명

하고 있다. '나라가 저자'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대는 대내외적으로 혼잡하고 어지

러운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는 남편이 단순히 위험에 처하거나 변심으로 인하여 아

내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하여 현실적인 개연성을 부여

하고 있다. 또한 위의 시는 원 텍스트에서 사용하던 후렴구를 그대로 사용하여 시적 분위기

를 이끌어가면서 정돈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에 답가 형식으로 진행되는 계집의 말에서는 시의 정서적 호소력을 높이기 위해 아내를

인고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섬세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원 텍스트의 그리움과 한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시적 화자의 어조는 한층 단호해지고, 체념의 정서는 짙어지고 있다. 원 텍스

트에서는 남편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면 이 시에서는 전통적이고 상징적

인 시어를 통하여 설명하면서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러나 시적 소재를 확

장시키고 다양화함으로써 독자는 원전보다는 한층 유대감을 높일 수  있다.

  '달빛, 꽃잎, 새, 햇빛, 금빛나라' 등의 친근하고 소박한 시어를 사용하여 서정적 분위

기를 고조하는 한편 원 텍스트가 지닌 비극성과 거리감을 다소 축소했다고 볼 수 있다.

  백제가요 <정읍사>와 홍해리의 <정읍사>를 비교하여 살펴보면, 홍해리의 작품에서

사용된 시어나 시적 분위기는 원 텍스트를 반영하고 있지만 시대적인 상황과 아울러 사건

의 개연성을 강조한다. 홍해리는 인간의 감정에만 호소하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인 원인을 재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원전에서 규명하기 워려웠던 사안들을

새로운 사건의 실미리와 함께 제시하면서 작품에 대한 이해도와 완성도를 넓혔다고 할

수 있다.

  홍해리의 시 <정읍사>는 원 텍스트의 제목을 그대로 하용하면서 사내와 계집의 이야

기로 노래하면서 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섬세하게 보여 준다. 원 텍스트의 그리움과

한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지만, 시적 화자의 어조는 한층 단호해지고 있다. 아울러 시적

화자의 체념은 짙어지고 있다. 원 텍스트를 남편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라고 규정하면

서, 여전히 전통적이고 상징적인 시어를 통해서 그 정서를 이어가고 있다. 다만 비극성

보다는 몽환적인 분위기로 서사를 전환하였다.

  고전문학 작품은 단순히 과거시대의 산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작되어서,

소통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고전의 현대적 변용

은 단순히 대중들에게 흥미와 친근감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텍스트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가치가 빛을 더한다. <정읍사>는 현대 대중들의 삶에 집중하면서

양심을 잃고 방황하는 대중들에게 참된 가치를 부여하는 동시에 경종의 메시지를 울리

면서 여전히 다채로운 콘텐츠의 활용을 시도하고 있다.

 

ㅡ 하경숙,『한국 고전시가의 후대 전승과 변용 연구』(2012, 보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