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시를 통해 나타나는 시인의 지향점 / 박승류(시인)

洪 海 里 2013. 12. 15. 21:19

시를 통해 나타나는 시인의 지향점

 

박 승 류(시인)

 

 

  세상에서 좋은 시가 어떤 시인지 묻는다면 어리석은 질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탓할 수만은 없다. 그러니 그 질문에 곧바로 답한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시다.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 세상에서 좋은 시는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왜 그리 변덕스럽냐고 탓한다면 그 공로를 시에 돌린다. 팔색조와 같은 시를 보라. 때와 장소와 독자의 심리상태에 따라 달리 보이는 시를 보라. 그러니 시를 대하는 사람의 마음에 죄를 묻고 싶다면 우선 시를 단죄해야 한다. 시인도 함께 단죄돼야 하는가라는 질문엔 답하지 않겠다.

 

  인간의 번민과 고뇌는 마음의 눈이 여러 각도로 분산되고 굴절되기 때문이다. []이란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지만, 세상만사 언제 어디서나 같게 보인다면 무슨 매력이 있을까? 사물이나 사건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인식되고 투영된다면 무슨 매력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세상은 단조로움으로 숨이 막힐 것이다.

 

  때문에 팔색조와 같은 심안心眼은 다양성을 지탱하는 힘이고 사색을 살찌우는 영양사이기도 하다. 그런 영양사가 만든 시를 만나다면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자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가 저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기 팔색조와 같이 여러 빛깔을 드러내는 시가 있다.

 

1

초롱꽃은 해마다 곱게 피어서

 

금강경을 푸르게 설법하는데

 

쇠북은 언제 울어 네게 닿을까

 

내 귀는 언제 열려 너를 품을까.

 

2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꽃초롱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 洪海里, 시집 금강초롱표제시 전문, 도서출판

 

  시금강초롱을 읽으면 사랑’ ‘번민’ ‘고뇌’ ‘수양’ ‘인내’ ‘해탈’······ 등의 단어가 떠오르는데, 이런 단어에는 다분히 종교적 색채가 묻어난다. 금강초롱꽃을 보는 화자의 시선이 어느 곳에 머물러 있을지 추측되는 부분이다.

  평생을 시와 가까이 지낸 시인은 시를 쓰는 것으로 자신을 수없이 닦았으리라 짐작된다. 자신을 닦는다는 것은 물론 수양을 나타내므로, 이는 과거에 대한 반성과 현재에 대한 성찰 그리고 미래에 대한 다짐이 끊임없이 이어졌을 것임을 의미한다.

  구도자적求道者的 자세를 가진 사람이 바로 시인詩人일 것이라는, 홍해리 시인과 절친한 임보 시인의 글을 읽은 적이 있지만, 금강초롱을 읽어보면 홍해리 시인이 바로 그런 모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너를 향해 열린 빗장을 감추지 못하지만 화자는 지금 고립되어 있다. 고립이 물리적 공간이 아닌 정신세계라고 해도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시에 등장하는 는 누구일까? ‘가 이성적 대상이든, 추구하는 가치관이든, 이루고 싶은 목표이든 큰 차이는 없다. 중요한 것은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한다며 상대를 향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다. 드러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또는 를 생각하는 마음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떳떳하지 못한 대상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고립이라는 대가를 치루는 것으로 지난날 과오를 반성하는 것이고, 또한 마음을 다스리며 행동을 절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못된 욕구를 절제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잘못된 욕구는 있다. 그 욕구를 숨기고 내숭떠는 것보다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수양이 경지에 다다른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화자는 지금 그 목표를 향하고 있다.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라는 결구는, 큰 깨달음은 멀리 있다 해도 가서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진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고립으로부터 얻은 선물이다. 금강초롱에서 고립은 자의로 비롯된 것으로 느껴지지만 고립이 자의든 타의든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고립으로부터 발생되는 많은 사색은 숙성을 동반할 것이고, 숙성은 자제력을 선물할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숙성은 시작詩作활동에서도 경험하게 된다. 사유思惟가 바탕이 되는, 시라는 창작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하게 되는 많은 생각은 시인을 구도자적 길로 안내하기도 할 것이니 말이다. 이는 시를 써 본 사람은 대부분 경험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 길에서 어쩌면 좋은 시를 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뎅그렁하는 쇠북()’의 울림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서두에서 팔색조와 같은 시를 말했지만, 사실 시의 본질은 이미 팔색조에 가깝다. 시의 요건을 갖춘 글이란 대부분이 다의적 언어조합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그 이유를 대신한다. 이것은 시를 읽고 그 감상을 쓰는 필자로서의 변명이기도 하겠지만, 같은 시를 자신과 다르게 읽는 것을 보는 것에서 증명이 되는 셈이다.

  다만 같은 시에 모든 사람이 다 감동받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생각은 의미가 넓고 깊다면 감동의 진폭 역시 그렇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나 외에 또 어떤 사람이 금강초롱을 유심히 읽었다면 분명 그 가능성은 더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시戀詩 같으면서도 번민고뇌가 묻어나는 금강초롱이니 분명 그럴 것이다.

 

  독자의 관심과 사랑을 오래도록 받는 시, 월간 우리역시 그런 시를 추구한다. 더불어서 생명사랑자연사랑을 위한 시를 가꾸고 또한 이웃과 나누려 한다. 이런 지향점도 구도자적 자세의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금강초롱에서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라는 결구는, 그런 월간 우리의 지향점을 대변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목표하는 바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시인과 그들의 모임. 개인과 단체의 지향점이 같다면 그것은 양자 모두에게 축복이다. 우리의 지향점과 구성원 모두의 지향점이 같다면 이보다 더 좋은 궁합도 없다. 그 결과로서 모두에게 상승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우리詩會, 그리고 월간 우리가 되기를 2013년 송년호 지면에서 빌어본다.

                                                                                                                                                                                                                           - 월간《우리詩》2013.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