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14일 목요일, 맑음

  시가 없는 세상은 절망이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적어도 우리 부부의 삶에서는. 모래 바람 불고 피할 길 없는 태양이 끊임없이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는 사막에 잠시라도 쉬어갈 그늘과 물이 있어 갈증을 달래고 나무 그늘에서 살랑대는 바람에 잠시 눈을 붙이는 기분... 그것이 시인들과의 만남이다. 우이동 골짜기에 삶이 풍부했던 것은 시인들과의 만남이었다.

 

  작년 늦가을, 마을버스를 타려다 박희진 시인을 만났는데 온통 하얀 머리에 너무 연로해 보여 선생님, 담에 올라오면 우리 집에서 식사 한 번 해요. 제가 맛있는 거 해드릴 게요.” 라고 인사를 했고 늘 어린아이처럼 밝은 웃음으로 좋지요.”라고 답하시던 분이 지난 3월에 돌아가셨고, 홍해리 시인과 가장 가까운 벗 이무원 시인도 그 뒤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두 부고는 임보 시인의 블로그에서 보스코가 알아낸 소식이었고 우린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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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 이번엔 우이동 시인들을 초대하여 식사나 한 번 합시다.” 이 참에는 내가 나섰고 그래서 오늘 이생진, 임보, 홍해리, 채희문 시인이 우리 집에 오셔서 점심을 드셨다. 1980년대부터 우이동 계곡에서 매주 마지막 토요일 시낭송회를 이어오신 분들이다. 그때부터 우리에게 한 달 치 영혼의 생수를 그분들에게서 길어왔다. 지리산으로 이사 가서는 그 우물가를 거의 못 찾았지만...네 분이 함께 펴낸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합동시집만도 스무 권이 넘는다.

 

  늙은 시인들이 집에 들어서면서 검은 봉지를 제각기 하나씩 들고 계셨다. 술 한 병, 떡 한 봉지, 그리고 참외 두 봉지... 시인다운 선물들을 받으며 웃음이 빵 터졌다. “시인께서는 시만 가져오시면 모든 선물이 가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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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모든 섬을 돌며 그곳의 구석구석과 사람들의 애환을 시로 영원히 결정(結晶)시키는 이생진 시인은 성산포에 시인께 바쳐진 시공원(詩公園)이 있는데, 해마다 제주에서의 시낭송회에는 28세로 장가가던 해에 당신이 담임을 맡았던 여학생 21명이 지금도 전원 제주로 모여 와서 선생님(87)의 시낭송을 듣는단다!

 

  “아내의 전성시대로 우리에게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선시(仙詩)를 쓰시는 임보 시인은, 내가 문정희의 치마와 임보의 팬티’”라는 글을 읽었다고 인사드리니 어느 모임에선가 저 임보입니다.”라고 인사소개를 했더니 ~ 팬티’!?”라고 하더라면서 이젠 내 예명(랭보를 좋아하여 임보(林步).’ 본명은 강홍기 교수)팬티로 바꿔야 할까 부다.”라면서 웃으신다.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를 식탁에서 낭창(朗唱)하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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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평생 난()을 수집하고 기르고 시로 읊어 오신 홍해리 시인은 지금은 아내의 치매를 보살피면서 이 네 분 시인이 발행하는 월간지 우리”(홍해리 시인이 이사장)치매행(致梅)’이라는 시를 연작으로 싣고 계셔서 부모의 치매를 보살피거나 자신의 앞날을 우려하는 우리 마음에 잔잔한 슬픔을 다달이 일으키신다. “가을 레슨으로 알려진 채희문 시인은 10여년전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에 살다 의정부로 이사가셨다. 우리 집 올라오는 작은 골목에 채희문 시인”, 동요 반달을 지은 윤극영 동요작가”, “소설가 안정효”, 더구나 우리집 바로 옆에 소설가 황석영이 살았으니 우리 동네는 문인촌(文人村)이다.

 

 

  오후 4시에 자리를 뜨면서 시인마다 방명록을 남겼는데 임보 시인은 술도 좋고/ 음식도 좋고/ 정도 좋고/ 오늘 같은 즐거운 날/ 또 있으리!”라는 글을 쓰셨다. “또 있으리?”라 하지 않고 또 있으리!”라고 쓰셔서 여운이 길다.

 

 

  임보 시인이 15년전에 네 문우를 그린 짧은 시 "네 마리의 소"가 인상적이다.

 

 

고불(古佛) 이생진은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은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는 들소

나 임보(林步)는 조그만 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