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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구멍의 변주곡 - 홍해리 시집『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 임채우(시인)

洪 海 里 2016. 9. 13. 13:17

<해설>


바람과 구멍의 변주곡

― 洪海里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임 채 우(시인)

 

 

1. 

   시인의 열아홉 번째 시집 제목은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이다. 이 시집을 당초 '우리詩'에서 기획출판 할 때 시집 제목을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시집이라는 것이 출판사에서 기획출판을 하든 개인이 상자하든 그 결과물이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창작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시집의 간판이나 다름없는 제목 선정에 있어서 시인의 의지가 발동했으리라 짐작된다. 왜 시인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이런 기다란 제목을 택한 것일까? ‘바람도 구멍이 이어야 운다에는 어떤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을까?

시집 제목이 들어 있는 시 한 편을 보기로 하자.

 

바다가 파도로 북을 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두 쪽의 입술이었다

밤이 되자 별들이 하나, 둘씩 반짝이고 있었다

떠들썩하던 천년 소나무들이 바다를 읽고 있었다

달빛 밝은 우주의 그늘에서

두 쪽의 입술이 잠시 지상을 밝혀 주었다.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혼자서 우는 것은 곡뿐이다

에는 개 머리 위에 두 개의 입이 있다

이쪽은 저쪽이 있어서 운다

쪽쪽 소리를 내는 것은 존재를 확인하는 일

쪽은 색을 낼 때만 쓰는 것이 아니다.

―「옥계 바닷가에서전문

 

   아마 옥계 바닷가의 밤 풍경인 듯하다. 세상은 잠들어 고요하나 하늘에는 별과 달이 다투어 빛나고, 밤바다는 파도로 일렁이며 밀려왔다 몰려가며 철썩대고 있었으리라. 사실 밤바다는 고요하고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밤이 되면 파도소리는 더욱 요란하고 방풍림들이 바람에 더욱 떠들썩하다. 파도가 치고, 소나무가 바람에 떠들썩하는 것은 하늘과 땅이라는 두 입술이 교감하며 내는 소리다. 바람과 구멍이 만나는 구체적인 소리인 것이다. 이를 하늘과 땅의 조화, 인연, 교감, 떨림 등등으로 싸잡아 표현한다.

애초 이 표현의 원류를 더듬어 오르다 보면 장자와 만나게 된다.

 

자기子綦가 답했다.

우주가 기를 내뿜는 호흡을 바람이라고 한다.

때로는 가만히 있다가

한번 터지면 땅 위의 모든 틈새에서 소리친다.

너만이 저 요요한 소리를 듣지 못하느냐?

산림의 꼭대기와

백 아름의 큰 나무 구멍은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두공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연못 같고, 웅덩이 같기도 하다.

물 부딪는 소리, 시위 소리, 꾸짖는 소리, 물 마시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 동굴의 소리, 새 울음소리

앞에서 울면 뒤에 화답하여 운다.

산들바람은 가볍게 화답하고, 회오리바람은 크게 화답하다가,

사나운 바람이 자면 모든 구멍들은 고요하게 된다.

그런데 너 혼자만

만물이 저마다 운행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단 말인가?”

―『장자』 「제물론齊物論부분

 

   이 대목은 남곽의 자기와 그의 제자인 안성자유子游의 대화다. 어느 날 제자가 보니 스승께서 몸은 꼭 마른 고목 같고, 마음은 꼭 죽은 재처럼 하고 책상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 있어서, 선생님의 모습이 어제와 같지 않다고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스승이 대답하기를 자기는 지금 몸을 잃고 네가 듣지 못하는 음악을 듣고 있노라고 말한다. 이로 보건대 음악에는 사람의 음악, 땅의 음악, 하늘의 음악이 있어 보통 사람들은 사람의 음악 정도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지만 지인至人만이 땅의 음악과 하늘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음악이란 바람이 구멍을 만날 때 나는 소리이며 구멍의 여하에 따라 각자 자기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옥계 바닷가에서에서 나는 소리들은 바람(하늘, 우주가 기를 내뿜는 호흡)이 구멍(, 유형무형의 사물이나 인연처)을 만나 내는 것들이다. 그 소리들은 천지 음양이 한 몸 되어 뒤섞이는 소리이며, 우주 운행의 이치이며, 모든 존재 생성의 소리다. 시인은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떠들썩한 소나무, 하늘의 별과 달을 보고 심상치 않는 우주의 이치를 예감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바람이라는 우주 생성의 기가 구멍이라는 존재 생성의 터전 위에서 삶의 구체적인 흔적인 소리를 내고 있다. 바람이 없으면 아무리 구멍이 많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구멍이 없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바람과 구멍이 만날 때 소리가 나는 것이다. 바람은 언제 어디나 있는 법이며 구멍의 여하에 따라 각자의 자기 소리가 난다. 이런 구멍에서는 이런 소리, 저런 구멍에서는 저런 소리, 각별한 구멍에서는 각별한 소리, 처연한 구멍에서는 처연한 소리가 난다. 이것이 드라마 같은 인간의 삶이며, 지고한 정신이며, 예술이며, 바로 시인 것이다. 실로 시인은 옥계 바닷가에서장자의 저 머뭇대는 군소리를 12행의 짧은 시로써 설파해 버렸다.

 

 

2. 

  2세기경 그리스의 지도학자 프롤레마이오스가 제작한 고대 지도를 보면, 이 지도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은 나오지 않는다, 지구 둘레에는 방위를 상징하는 12명의 신이 바람을 불고 있는 그림이 인상적이다. 그러니까 서양에서 바람은 신들이 내뿜는 것이다. 동양의 자연관과 서양의 신관이 다를 뿐 바람은 초인간적인 어떤 근원적인 힘이다. 서로 전혀 교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원형적인 사고의 유형은 동서양이 비슷하다. 여기서 바람과 구멍의 실상과 관련해서 짧지만 중요한 시 한 편을 보기로 하자.

 

한평생

바람만 피웠다

 

여름내 무더위에

몸뚱어리 흔들어 쌓다,

 

살은 다 찢겨나가고

뼈만 남아,

 

초라한 몰골,

아궁일 바라보고 있다.

―「부채전문

 

   이 시를 이해하는데 각별히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짧은 시를 접한 독자들은 대개 아, 중의적인 표현이 되어 있는 시로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어쩌면 젊어 바람만 피우다가 이제 노년에 기운이 다 빠져 폐기처분 직전의 바람둥이나 난봉꾼을 떠올리며, , 당연지사이지 하고 의미 있는 조소를 머금을 지도 모르겠다. 해석이 다양하다는 것이 이 장르의 커다란 장점이다.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시의 함축성은 큰 것이기에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바람구멍소리의 이치에서 바로 구멍의 이야기다. 바람을 항구적인 것으로 본다면 구멍은 바람이라는 것을 품에 안아야 하는 유한한 존재다. 왜 부채는 한평생 바람만 피웠는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구멍이 바람을 맞이하여 소리를 내는 행위이다. 그것이 한평생이었다면 거의 운명적이다.

바람을 우주에 편만한 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구멍은 이런 시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붙드는 시인이다. 그리고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시적인 것을 시인이 붙들어 언어화시키는 창조적인 작업이다. 시적인 것이 시가 아니고, 시인도 시가 아니다. 바람이 구멍을 만나야, 시적인 것이 시인을 만나야 한 편의 시가 지상에 오롯이 남는 것이다.

이 시는 바람둥이의 말년을 초라하게 노래한 시가 아니다. 평생 창작에 매진한 자의 진실한 자기 삶의 성찰인 것이다. 이것은 유한한 구멍들의 운명이다. 부족함을 스스로 느끼는, 자기 성실성이며, 그런 존재를 성찰할 수 있기에 시인은 실로 위대한 존재다.

 

3.

  그의 이번 시집을 두고 어떤 이는 선시仙詩 풍이라 하고 어떤 이는 불가의 오도송悟道頌과 비슷하다고 한다. 모두 일리 있는 식견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시인께서 시작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극히 말을 아끼는 것이 짧은 잠언箴言이나 경구警句 등의 지향성으로 보이는데 결국 이 모든 것이 시어의 운용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다음은 이 시집 제1부의 4행시 중 몇 편을 골라 한 행씩 적어 본 것이다.

 

1) 마음도 조금쯤은 비워 두어라 ―「지금 여기부분

2) 눈멀어 듣고 귀먹어 보아라 ―「붓꽃筆華〕」 부분

3) 가을 햇빛은 잘 벼린 사내의 칼날처럼 빛난다 ―「가을 수채화부분

4) 세상이 문드러져 문둥이 같다 ―「말복末伏부분

5) 우금우금, 우는 소리 가을 빗소리 ―「우금실雨琴室부분

6) 누구나 수평선 향해 손 모으고 바다를 품에 안네 ―「향일암부분

7) 예까지 허영허영 허투루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동지冬至」 부분

 

   우리말의 높임법은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의해서, 또는 객체의 높임 여부에 의해 주체높임법, 객체높임법, 상대높임법이 있다고 아마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이나 문법 시간에 배웠을 것이다. 여기서 주체높임법과 객체높임법은 논외로 하고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의해 종결어미에 의해 시행되는 상대높임법에 주목하자.

우리말의 상대높임법에는 격식체 4단계와 비격식체 2단계가 있다. 격식체 4단계는 하십시오체(아주높임), 하오체(예사높임), 하게체(예사낮춤), 해라체(아주낮춤)가 있고, 비격식체 2단계는 해요체(두루높임), 해체(두루낮춤-반말)가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7)은 청자를 높이는 하십시오체다. 7)과 같은 아주높임은 상대방을 높임으로서 상대적으로 자기 자신이 낮아지는 공손한 어법이다. 이 높임법은 시에서 전달이 부드럽게 용이하나 어세가 그만큼 약하다는 단점이 있어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 든다. 6)은 하게체(예사낮춤)이다. 하게체는 또래나 격식을 갖춰야할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투다. 점잖게 타이르듯이 다소 너그러움이 배여 있으나 결코 선을 넘지는 않는다. 5)는 명사로 문장을 끝맺고 있어 높임법이 실행되고 있지 않다. 시에서는 운율이 1차적으로 고려되기 때문에 종종 종결어미의 사용이 생략되거나 유보되는 경우가 많다. 1)2)3)4)는 해라체(아주낮춤). 이 시집에서 단연 이 높임법의 빈도가 가장 많다. 3)4)와 같은 단정적으로 확고한 ‘-의 종결어미는 주체의 흔들림 없는 고정성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시인의 흔들림 없는 확고부동한 견고함이다. 시인이 굳건한 토대 위에서 지금 바람을 맞고 있다는 자각의식이 이 높임법의 애용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특히 1)2)‘-간접명령문 종결어미의 사용은 노시인의 인생의 지혜가 담긴 잠언이나 독자들로 하여금 가치 있는 행동이나 의식화를 촉구하고 있는 경구의 사용 어법이다. 이 어법은 다분히 청자를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나 결코 계몽적인 성격의 언사는 아니다. 독자들은 지독한 역설이 오히려 화자의 연륜이 배인, 암담하고 처연한 고통을 뚫고 퍼지는 햇살임을 감지한다. 이와 같은 종결어미를 빈번히 사용하는 시인의 시작태도는 독자를 향한 부드러운 카리스마인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언어적 작위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투철한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 

   시인은 말의 조련사이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말을 이렇게 실감나게 잘 운용하는 시인이 있을까 감탄을 금할 길 없다. ‘시는 언어 놀이라는 평소 시인의 지론에 손색이 없이 그야말로 말을 가지고 장난치며 논다. 실로 언어의 마술사다.

어느 시편을 들추어보아서 언어유희(말장난, 말재롱, pun, 言語遊戱)가 재치 있게 빛난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시에 놀이적 요소를 가미하여 재미를 북돋워주는 방식이다. 시 한 편을 보기로 하자.

 

살이로다 살로써 살을 뚫고 쌀로서 쌀 일이로다

살을 날려 살을 막고 살살 기는 저놈을 보아라

살이 살을 먹는 세상 살을 섞어 무엇 하랴.

 

알이로다 알이로다 공알 물알 불알이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알른알른 네 그림자 나를 두고 가려느냐.

 

잘랑잘랑 잘그락잘그락 잘똑잘똑 잘카당잘카당 잘근잘근 잘싸닥잘싸닥

잘박잘박 잘그랑잘그랑 잘강잘강 잘파닥잘파닥 잘착잘착 잘코사니!

찰가닥찰가닥 찰딱찰딱 찰바닥찰바닥 찰칵찰칵 찰그랑찰그랑 찰싹찰싹

찰가당찰가당 찰박찰박 찰카당찰카당 찰방찰방 찰랑찰랑 넘치누나!

 

칼날 위에 칼춤 추는 칼새 같은 사랑아

타령이나 한바탕 춤으로 엮으면서

파리 발 드리지 말아라.

 

!

―「부분

 

   위의 시는 ㄱ→ㅎ까지 말소리의 특성을 유감없이 살린, 우리말의 풍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이 이 놀이에 얼마나 심취해 있는지 말소리의 의미는 진즉 저 멀리 팽개쳐버렸다. 생각해 보라,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데 그 놀이를 통해 어떤 유익이나 의미를 따지면서 노는가? 유익이나 의미라는 것은 재미를 상실해버린 어른들의 고지식한 따지기이고 아이들은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시가 바로 그런 경지이다. 언어를 가지고 신나게 놀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만 그가 가지고 노는 말들을 살펴보면 선택된 최초의 말소리 하나에서 연상되는 동음이어나 비슷한 소리를 확산해가며 점점 주술처럼 심취해 들어가는 것이다. 쌀은 쌀끼리, 보리는 보리끼리, 피라미는 피라미끼리, 사람은 사람끼리 서로 어깨동무 하면서 노는 양이 실로 흥겹다.

이런 언어유희는 크고 작게 그의 시편에서 섞어 쓰는 양념 같은 것으로 소리의 인접성에 의해 시상을 전개하거나 시행을 배열하는 환유적인 수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5. 

   시인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시적인 것을 만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러기에 시에는 삶 그 자체를 사실적으로 노래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일상이 하나의 모티브로 작동하여 보다 큰 상상의 세계나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로 내달리기도 한다.

   이 시집 속에도 어떤 시편은 시인의 시사詩史라 할 만큼 일상과 밀접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어떤 시편들은 의도적으로 현실에서 벗어난 것도 있다.

납량納凉동백은 비교적 차분한 과거의 사실적인 경험담을 늘어놓고 있다.

   시 납량納凉19508(6·25가 일어나 공산치하인 듯하다) 폭염과 가뭄으로 농촌에 물이 없어 물싸움으로 이웃 간에 살인까지 저질렀다가, 이번에는 폭우로 물난리를 겪은 이야기이다. 납량이란 여름철에 더위를 피하여 서늘함을 맛봄을 말함인데 흔히 오싹하여 더위를 잊는 공포 드라마를 납량 특집이라고 한다. 그 여름이 살인적인 폭염과 가뭄이었다가 둑 아래 논이 몽땅 씻겨 내려갔다니 납량이 맞다. 그러나 1950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이미 독자들에게는 진짜 납량이리라. 이 이야기는 바람의 가역 반응이라고나 할까. 바람이 이렇게 불다가 정반대로 붐으로써 구멍이 다르게 소리 나는 예라면 지나친 해석인가. 아무튼 이 기억이 시인의 무의식 창고에 내장되어 있다가 반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어떤 계기로 인하여 수면 위로 불쑥 솟아오른 것이다.

   시 동백은 또 어찌된 내력인가. 한때 시인께서 난에 심취하여 직접 난을 채취하러 저 남쪽 산이며 섬을 더듬고 다닐 때의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백꽃이 피어 있는 동백나무에 섬 주민들이 개를 걸어 몽둥이로 패면서 개를 잡는 장면을 목격한 듯하다. 이 두 가지의 붉음, 동백꽃과 개의 낭자한 선혈이 겹치면서 아름다움 속에 담겨 있는 살의에 대한 시인의 무의식이 수십 년을 경과하였어도 지워지지 않고 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그 장면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평범성이 오히려 상당히 정신적 외상이 깊다는 증거다. 이런 것이 바로 시다. 실제의 힘, 사실성이 상상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시 한 편을 보기로 하자.

 

입이 큰 여자가 하얗게 울고 있었다

 

탱자나무 감옥에 갇힌 달을 안고

여자가 천길 절벽으로 뛰어내리자

대청호大淸湖 물고기들이 튀어올라

온몸으로 현암사懸巖寺 쇠종을 치고 있었다

 

삼천 송이 목련꽃이 지던 밤이었다

―「곡두전문

 

   우선 제목부터 점검해 보자. 꼭두박물관장 김옥랑의 말에 의하면 꼭두(곡두)는 한국 전통상례문화의 맥락에 속해 있는 것으로, 전통 상례에서 망자를 묘지까지 모시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상여인데, 상여를 장식한 나무 조각품이 바로 꼭두라고 한다.

   꼭두는 이 세상과 저 세상, 일상과 비일상, 그리고 현실과 꿈 사이에 있는 존재로서, 양쪽 세계를 넘나든다는 특징이 있다. 이 세상을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여행하는 이와 동행하면서 길을 안내하고, 안전하게 지켜주며, 괴로워하거나 슬픔에 잠긴 이를 위로하는 일을 한다. 꼭두는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대체로 용과 봉황, 호랑이와 같은 동물의 형상과 시종이나 광대처럼 인물의 형상으로 나누어지는데 근대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전통상여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지금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 시에서 곡두는 입이 큰 여인네 형상이다. 이 곡두가 울면서 탱자나무 감옥에 갇힌 달을 안고 천길 절벽을 뛰어내리자 대청호 물고기가 뛰어올라 현암사의 쇠종을 쳤다는 것이다. 이 밤이 삼천 송이 목련꽃이 지고 있는 밤이라 했다. 이해가 가는가?

이 시를 현실 속에서 사실적인 맥락으로 이해하려는 독자는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편의 아름다운 시임에는 분명하다. 시란 것이 꼭 논리적인 이치에 닿아야만 시인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에 촉발된 시인의 상상이 이렇듯 멀리 가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곡두라는 입이 큰 여인네의 형상과 하얗게 울고 있다는 것, 천길 절벽을 뛰어내린다는 것, 삼천 송이 하얀 목련이라는 것이 뭔가 죽음에 닿아 있음을 직감한다. 탱자나무 감옥에 갇힌 달이며 대청호의 물고기, 바위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현암사의 쇠종 등은 다만 시인의 저 무의식 속의 어떤 것이라고, 극히 개인적인 상징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자. 시란 그런 것이다. 때론 시인이 시에다 수수께끼 하나를 집어넣어 놓았는데 그것이 스핑크스의 그것처럼 초보적인 단계가 아니라 아무리 파고들어도 내가 시인이 아닌 이상 도저히 풀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이다. 곡두는 문맥상 파악은 어렵지만 느낌으로 와 닿는 그런 시다. 그래서 때론 시인들을 경계 없는 영역에서 노는 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 월간《우리詩》2016. 11월호

- 임채우 산문집『시가 말을 걸었다』(2017, 도서출판 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