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가을 들녘에 서서 / 정일남(시인)

洪 海 里 2016. 10. 12. 10:19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달력을 보니 막대 두 개가 서 있다. 11월은 그렇다. 좋은 시절은 가고 춥고 황량한 들판이 앞에 가려 있다. 무언가 인간은 정리하고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 시기에 와 있다. 농부들은 자루에 알곡을 담고 곡간을 채우는데..., 시인은 무엇을 했던가. 손에 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빈손이다.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죽음까지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는 것도 부질없다. 무엇을 잡으려고 떠돌기만 했다. 내 자신을 찾으려고 하진 못 했던 것이다. 이런 11월이 시인 앞을 지나간다.

 

  홍해리 시인도 빈들에 서 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눈이 멀어야 아름답다고 한다. 이 말은 세상을 보고 있으니 모두 불만스럽다는 것이다. 차라리 보지 않아야 하는데 보는 것마다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귀로 듣지 말아야 세상이 황홀하다는 것이다. 들려오는 소리마다 마음 상하고 괴롭고 그런 사회.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것 모두를 버려야 비로소 가득 찬다는 것. 다 추수해 가고 난 빈들에 서서 우두커니 뒷짐 지고 내일을 바라보는 이 시인이야말로 눈물겹지만 스스로를 만족하는 기쁨이 부럽고 빛난다.

 - 정일남(시인)

[출처] 가을 들녘에 서서|작성자 솔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