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약속 -치매행致梅行 · 23​ / 정일남(시인)

洪 海 里 2016. 10. 12. 10:17

약속

-치매행致梅行 · 23

 

         洪 海 里

 

언제 여행 한번 가자

해 놓고,

 

멋진 곳에 가 식사 한번 하자

해 놓고,

 

봄이면 꽃구경 한번 가자

해 놓고

 

지금은

북풍한설

섣달그믐 한밤입니다.

 

 * 홍해리 시인의 아내는 불과 사오 년 전만 해도 서울시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한다. 집에서는 세 아이의 어머니며 시인인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던 현모양처였다, 자식들 키워 며느리도 보고 손자 손녀도 커가는 행복한 집안이었다, 그래서 정년퇴직도 했다. 그동안 이루지 못 했던 여행도 하고 여유롭게 살 일만 남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건망증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기억력 감퇴에 실어증 증세까지 나타났다. 언젠가 홍해리 시인이 시낭송회서 동료 시인들께 말하기를 "집사람이 명사를 기억하지 못해"라고 말해 동료시인들이 깜짝 놀라게 된 것이다. 이렇게 아내는 치매를 앓게 된 것이다. 아직 치매가 올 나이도 아니고 왕성한 활동을 할 나이에 당한 불치병. 이렇게 찾아오는 아내의 병을 예감하지도 못하고 시인은 집필에만 매진했던 것이다.

 

  언제 우리 남해든 제주도든 아니면 태국 방콕이든 타이페이든 손잡고 여행 갔다 오자. 그 여행 당신 교직생활로 못 했으니 한번 가자. 그런 다짐도 했고, 멋진 호텔에 가서 남들처럼 좋은 식사도 하자. 그거 우리라고 못 할 게 없지. 봄이 오면 꽃구경도 같이 가서 놀다 오자. 그거 누가 못하게 말리겠나. 우리 둘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그런데 그 약속이 다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꽃구경도 여행도 건강이 뒷받침을 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것이 불가능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홍해리 시인은 며칠 전에 전하기를 지금 방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있다고 했다.

- 정일남(시인)

[출처] 약속|작성자 솔봉

* 약속을 지키지 못했나 보다.
봄이 오면 꽃구경 한번 가자 해 놓고서 가지 못했었나 보다.
북풍한설 섣달그믐 한밤에 지나온 시간을 되돌려보고 있다.
내년 봄에는 꽃구경을 못 가는 것일까?
그렇다.
봄은 다시 오겠지만 이제는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여행인이나 맛있는 음식은 때를 놓치면 안 되나니.
다음으로 미루다 가는 섣달그믐 한밤이 돼버릴지 모른다.
[출처] 시인 홍해리의 시 - 약속|작성자 cni1577 (2021.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