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수채화
가을 햇빛은 잘 벼린 사내의 칼날처럼 빛난다.
가을비는 버림받은 계집의 짜장면처럼 운다.
가을바람은 노란 볏논에서 금계랍처럼 분다.
가을 하늘은 솔개처럼 느긋하게 높고 푸르다.
♧ 소요逍遙
한로 부근 햇빛은 맑다 못해 투명 그 자체
햇볕 속에서 익어가는 원형의 전설
안개 가득한 지상에 또르르 굴러가는 적막
묵언의 절간 하늘에 뜬 한가로운 흰구름장.
♧ 가을 저녁때
구진구진
궂은비
끄느름한
저녁때
두런두런
모여드는
발자국 소리
주막집
처마 끝에
지는 빗소리.
♧ 적막을 위하여
불알 두 쪽 사내도 못 되어서
눈도 가려진 무거운 길목에서
너는 홀로 고요해지려는 것이냐
더욱 환해지는 달빛을 보려거든
출렁이는 무덤 같은 너의 두 유방
슬픔으로 몸을 입는 한때가 있었거니
저 밝은 죄, 환한 죄 같은 것으로
너는 열병처럼, 염병처럼 우는 것이냐
고요해지고 또 고요해져서
드디어 적막에 들거든
지독한 어둠도 더욱 단단해지리니
달빛 속으로 홀로 흘러 흘러들어가
네가 숨을 수 없는 허공을 아득히 채우거라
한 생이란 한 줌 모래알이 흘러내리는 시간
모래알을 세게 움켜쥐면 쥘수록
시간은 빠르게 빠져나가기 마련이라서
적막은 스스로 제 속에 고요를 기르고
쓸쓸함과 외로움도 겹쳐 하나 되는 것이니
마음이란 깊고 넓기 그지없음을 부디 알거라
이루지 못하고 가차 없이 떨어져 내리는
마음속 오래뜰에 하얀 소리의 파편들이 보이거든
허예진 추억의 물꽃이라 여기거라
지는 것은 아름답기 분통같아서
꽃도 싸움도 일찍 진 것이 오래가느니.
♧ 길은 살아 있다
길이 방긋방긋 웃으며 걸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길에도
날개와 지느러미가 있어 날고 기고 헤엄친다
길이 흐느끼며 절름절름 기어가고 있다
길이 바람을 불러 오고 물을 흐르게 한다
꽃도 길이 되어 곤충을 불러 모은다
길은 긴 이야기를 엮어 역사를 짓는다
길에는 길길이 날뛰던 말의 발자국이 잠들어 있다
길이길이 남을 길든 짐승의 한이 서리서리 서려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몸에 길이 있다
영혼도 가벼운 발자국으로 길을 낸다
태양과 별이 지구를 향해 환한 길을 만든다
시간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길이다
기다리는 길이 끊어지고 사라지기도 한다
발바닥 아래 생각이 발딱거리며 가고 있다
사랑도 이별도 길이 되어 멀리 뻗어나간다
사람도 길이 들고 길이 나면 반짝이게 된다
눈길 손길 발길 맘길로 세상을 밝힌다
가장 큰 길은 허공과 적막이다
발자국은 앞서 가지 못한다
길은 따뜻하다.
♧ 가랑잎
가랑잎은 바람에 몰리는 것이 싫다
가랑잎은 한구석에 모여 끼리끼리 잠이 든다
찬바람에 내몰리는 삶
고향을 떠날 때부터 정처 없는 몸이었다
어디 뿌릴 내릴 힘도 없어
단지 밀리다 부려지는 삶
가랑가랑 잠 못 드는 소리
오늘 밤도
바스락바스락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숙인과 숙자
성이 노氏였다.
* 홍해리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도서출판 움, 2016.)에서
사진 : 요즘 오름을 장식하고 있는 당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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