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의 가을 詩篇
9월 마지막 날
표선면 가시리 갑마장길을 걷다.
코스 중 따라비오름과 큰사슴이오름 주변에는
억새가 벌써 피어나 부는 바람에 힘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바람이 어떻게나 센지
옆 사람 말소리도 잘 안 들릴 정도인데,
억새는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한껏 출렁댄다.
그걸 찍어 본 사진 중 몇 컷을 골라
홍해리 선생님 페이스북에 올린
가을시편과 함께 싣는다.
♧ 가을 산에서
-牛耳詩篇 · 8
혼백을 하늘로 땅으로 돌려보낸
텅 빈 자궁 같은, 또는
생과 사의 경계 같은
가을 산에 서 있었네
지난 봄 까막딱따구리가 파 놓은
오동나무 속 깊이
절 한 채 모셔 놓고
가지에 풍경 하나 달아 놓았네
감국 구절초 쑥부쟁이에게
안부를 남기고
물이 만들고 간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무장무장
먼 산에 이는 독약 같은 바람꽃
맑은 영혼의 나무들이 등불을 달고
여름내 쌓인 시름을 지우고 있었네
서리 내릴 때 서리 내리고
스러지는 파도가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지나간 세월이 내일의 꿈이 될 수 있을까
먼 길이 다가서는 산에 혼자 서 있었네.
-시집『봄, 벼락치다』(우리글, 2006)
♧ 가을 들녘에 서면
다들 돌아간 자리
어머니 홀로 누워 계시네
줄줄이 여덟 자식 키워 보내고
다 꺼내 먹은 김칫독처럼
다 퍼내 먹은 쌀뒤주처럼
한 해의 고단한 노동을 마친
허허한 어머니의 生이 누워 계시네
알곡 하나하나 다 거두어 간
꾸불꾸불한 논길을 따라
겨울바람 매섭게 몰려오는
기러기 하늘
어둠만 어머니 가슴으로 내려앉고
멀리 보이는 길에는 막차도 끊겼는가
낮은 처마 밑 흐릿한 불빛
맛있는 한 끼의 밥상을 위하여
빈 몸 하나 허허로이 누워 계시네.
-시집『봄, 벼락치다』(우리글, 2006)
♧ 시월
가을 깊은 시월이면
싸리꽃 꽃자리도
자질자질 잦아든 때,
하늘에선 가야금 퉁기는 소리
팽팽한 긴장 속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머언 만릿길을
마른 발로 가고 있는 사람
보인다.
물푸레나무 우듬지
까치 한 마리
투명한 심연으로, 냉큼,
뛰어들지 못하고,
온 세상이 빛과 소리에 취해
원형의 전설과 추억을 안고
추락,
추락하고 있다.
♧ 사랑이여 가을에는
-향부자香附子
사랑이여 가을에는
네 몸에 불을 질러라
다 태워버려라
한여름 피어오르던 짙은 젊음
이제 마른 풀잎으로 남아
시든 허상뿐
겉불을 질러
겉으로 무성한 허무의 껍질
다 태우고 나면
허망한 잿더미
바람에 풀풀 날리고
다 쓸려가고 나면
남을 것은 이 지상엔 없다
땅 속 깊이 묻혀
불로도 타지 않고,
죽지 않고 박혀 있는
사랑의 뿌리
다시 캐내어
불로 사루고 사루면
까맣게 남는 새까만 알갱이
그것도 사랑은 아니다
다시 씻고 부시고 닦으면
한 줌 금으로 남을까
다 타서 없어진
네 사랑이 향기로울까
사랑이여
이 가을에는
네 몸에 불을 질러라
다 태워버려라.
-시집『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 가을 수채화
하늘이 맑은 날
산에 올라
머리 풀어 바람에 빗듯
창틀 위 난초 이파리들
바람에 몸 씻고 있네
이파리 사이마다
바람도 한 몸 이루어
천지가 청상흔흔하다
난초 속에 부처가 앉아
바람으로 시를 빚어
푸른 향을 천지에 날리니
은은한 독경 소리
우주가 고요하다
난초꽃 속의 삼만 오천 세계
적멸 암자의
사미니 가슴속 같네.
-푸른 느낌표!』(우리글, 2006)
♧ 가을 편지
거대한,
투명한 공이
통, 통, 통,
튕기며
굴러가는
소리,
솔바람 냄새
난다고,
적어 보낸
오색 엽서를
또르르, 또르르르
읽고 있는
귀뚜라미,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달.
-시집『비밀』(2010, 우리글)
♧ 추석
차서 기울고 기울었다 다시 차면서
그대가 삶의 문턱을 넘어서기까지
천년도 더 걸렸다
치렁한 치맛자락
물 머금은 저고리 안섶
하늘하늘 하늘로 날아오르는
날개옷 스치는 소리
은분을 발라 치장한, 그대의
환한 얼굴
발그레한 볼
연연한 그리움으로 가슴에 금물이 드는
이 지상에서 그대를 본다
달아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우이동 시인들 20집『가슴속에 피는 꽃』(1996.11.)
♧ 가을 단상
한때는
오로지 올라가기 위해
올라서기 위하여
올라갔었지마는
이제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
내려가는 일
아름답게 내려가는 일
산천초목마다
저렇듯 마지막 단장을 하고
황홀하게 불을 밝히니
하늘이 더 높고 화안하다
들녘의 계절도
무거운 고개를 대지의 가슴에 묻고
깊은 사색에 젖어
이제 우리 모두 우주의 잠에 들 때
맑게 울려오는 가락
천지 가득 퍼지고
잔잔히 번지는 저녁놀
들판의 허수아비를 감싸안는다
산자락 무덤가의 구절초도
시드는 향기로 한 해를 마감하고
그리고
과일이 달려 있던 자리마다
시간과 공간이 하나가 되니,
오르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기 위하여
아름답게 내려가기 위하여
깊이 깊이 껴안기 위하여
오르는 것뿐.
-시집『은자의 북』(1992,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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