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계영배戒盈杯

洪 海 里 2018. 12. 28. 04:36


계영배戒盈杯

 

洪 海 里

 

 

속정 깊은 사람 가슴속

따르고 따루어도 가득 차지 않는

잔 하나 감춰 두고

한마悍馬 한 마리 잡아타고

먼 길 같이 떠나고 싶네

마음 딴 데 두지 마라, 산들라

세상에 가장 따순 네 입술 같이나

한잔 술이 내 영혼을 데우는 것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그리움처럼

줄지도 넘치지도 않는 술잔 위로

별들이 내려 빙글빙글 도는 것은,

무위無爲도 자연自然도 아니어서

내 마음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인가

은자隱者의 눈빛이나 미소처럼

입안 가득 번지는 넉넉한 향을

눈물로 태울까 말씀으로 비울까

온몸으로 따루어도

채워지지 않고 비워지지 않는

잔,

깊고 따뜻한 너.

 

- 시집『비밀』(2010, 우리글)





영배戒盈杯*

- 홍해리 선생님의 시계영배」를 감상하다가

김세형



늘 내 애간장을 태우기만 하는 계집애,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꼬셔도

늘 입술 이상은 허락치 않는 계집애,

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입술로

한마悍馬** 같나를

늘 제 곁에 꼼짝 못하게 붙들어 매놓는 계집애,

취하게 할 듯 말 듯, 늘 날 희롱하기만 하는 계집애,

황홀한 그 입술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댈 것 같으면

만취한 듯 제 한몸 던져

비단결인 양 착, 내게 감기기라도 하련마는

결코 제 한 몸 내게 내던지지는 않는 계집애,

입술 끝만 살짝살짝 내게 허락하곤, 줄 듯 말 듯

용!용! 양볼 손가락질로 늘 날 약통 올리기만 하는 계집애

그래서 날 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하는 계집애,

자신이 취하지도,

날 만취하게 하지도 않는, 약고 현명한 계집애,

공맹의 몇 백 대 후손 손녀딸 같은 계집애,

계영배, 고 계지배***.


*계영배戒盈杯-술이 일정량에 이르면 새어나가도록 만든 술잔.

일명 절주배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에 이르러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넘치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술잔이다.


** 한마- 홍해리 시인님의 시에 나오는 단어.

* ** 계지배-계집애, 계영배 소리음과 맞춰 소리음으로 표현했음.

   - 김 세 형(시인)




* 동행의 길
  친구나 술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좋다고 한다. 오랫동안 쌓인 굴곡진

연륜들이 그 추억들이 아름답게 혹은 아리게 각인되어서 그 아픔 자체가

통증을 넘어선 또 하나의 아득한 향훈으로 승화되어서 그런지 모를 일이다.

맘에 꼭 맞는 도반과의 대작은 밤새도록 이루어져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따르고 따루어도
차지 않는
텅 빈 가슴
비워내도
채워도
텅 비어 가득한 잔
어디 있느냐
나의 사랑아
거친 눈물 담을 빈 잔


* 홍해리시「계영배戒盈杯」에 부쳐
─ 졸시, 「빈잔 」 전문)


  계영배戒盈杯는 무엇인가? 철철 넘치도록 따르고 따루어도 넘치지 않는

늘푼수가 넓은 잔...... 화자는 그런 넉넉한 품과 변치 않는 동행을 그리고

있으리라.


“...은자隱者의 눈빛이나 미소처럼/

입 안 가득 번지는 넉넉한 향을/

눈물로 태울까 말씀으로 비울까/

온몸으로 따루어도/ 채워지지 않고 비워지지 않는...”


  과연 이러한 속 깊은 애인은, 동행은, 숙박지는, 어디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벌써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여행의 빈 배낭 하나가 방구석에서

곤히 쉬고 있다.

자 이제 어디로 떠날거나?

 

    - 나 병 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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